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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안 법정시한'이 아닌 헌법을 어긴 자들

뉴스후비기

by hangil 2017. 12. 4.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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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첫 예산안인 ‘2018년도 정부 예산안122일까지 처리되지 않았다.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흔히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을 넘겼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만으로는 122일이 가지는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법정시한이란 법으로 정한 시한이란 뜻일 테다. 고로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이라함은, ‘어느 어느 시간까지는 예산안을 처리하도록 법에서 정했다는 뜻이다. 이 정도 표현만으로도 법이 정한 시한을 당연히 지켜야한다는 의미까지 내포하고는 있다. 하지만 122일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한 법정시한의 틀을 훨씬 뛰어넘는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1654건의 법률이 있다. 하위법령인 대통령시행령이나 각종 행정규칙, 지자체 조례 등을 뺀 법률만으로 그 정도 숫자가 나온다. 모든 법령의 최상위 법은 오직 하나가 있다. ‘헌법이다


수천, 수만개의 법령이 있지만 헌법에 어긋나거나 헌법에 맞지 않는 법령은 존재할 수 없다. 헌법에 어긋나는 법령은 위헌이고, 헌법에 맞지 않는 법령은 헌법불일치.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법률 내용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리면 해당 내용은 즉각 법률로서의 자격을 상실한다. ‘헌법불일치결정이 내려진 법률은 서둘러 일치되는 내용으로 개정해야 한다. 헌법은 지켜야 하고, 헌법에 어긋나는 부분은 하루 빨리 바로 잡아야하는 것이다.

 

매년 122일은, 1654건의 법률이나 수천 수만건의 하위법령 어디선가에 등장하는 날이 아니다. 바로 헌법에 못 박혀 있는 날짜다. 헌법 제54조 제2항에서는 정부는 회계연도마다 예산안을 편성하여 회계연도 개시 90일전까지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전까지 이를 의결하여야 한다고 정해두었다. 


새로운 회계연도가 시작되기 90일 전, 즉 매년 103일까지 내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할 의무가 정부에게 있고, 국회는 매년 122일까지 이를 의결해야 할 의무가 있다. 헌법이 정부와 국회에 각각 부여한 의무다.

 

정부는 헌법에서 정한 예산안 국회 제출시한을 보다 확실하게 지키기 위해 국가재정법이라는 법률 제33조에서 정부는 제32조의 규정에 따라 대통령의 승인을 얻은 예산안을 회계연도 개시 120일 전까지 국회에 제출하여야 한다고 정했다. 헌법에서 정한 날짜보다 30일 더 일찍 국회에 제출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헌법을 만든 국회는 헌법이 정한 날짜를 어기기가 일쑤였다. 새해 예산안은 새해가 되어서야 한밤중이나 새벽녘 또는 새해가 밝고 나서야 국회 본회의장에서 처리된 것이 익숙한 새해 풍경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예전에는 새해 예산안이니 새해가 되어서 처리되나보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이러한 구태가 반복되자 국회는 선진화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헌법을 지키기 위한 개선책을 내놨다. 2012년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의 한 대목으로 예산안의 본회의 자동부의’(국회법 제85조의3)가 새로 생겨난 것이다.

 

국회법 제85조의3에 따르면 국회의 각 상임위는 새해 예산안에 대한 심사를 1130일까지 마치도록 했다. 만약 1130일까지 마치지 않으면, 그 다음날 즉 121일에는 심사를 마친 것으로 간주되고, 특히 이날 본회의에 자동으로 부의되도록 했다. 본회의에 부의된 안건은 국회의장이 바로 안건으로 상정할 수 있어, 헌법에서 정한 122일까지 예산안을 의결하도록 이렇게 정했다.

 

이 조항이 새로 생긴 2012년 이후 한동안 국회는 헌법에서 정한 기한을 지켰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집권하고, 여소야대가 되어 있는 2017년 국회는 헌법이 정한 예산안 처리 시한을 어겼다. 공무원 증원 등 정부의 예산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야당들의 책임이 큰지, 야당의 협조가 없이는 그 어떤 안건도 처리할 수 없음을 알고도 야당을 설득하지 못한 여당의 책임이 큰지는 저마다 생각이 엇갈릴 것이다. 저마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2017년 11월 1일 '2018년도 예산안 국회 시정연설'


그럼에도 야당들이 주로 반대하는 예산이 문재인 정부의 핵심공약을 실천하기 위한 예산이라는 점에서, 박근혜 탄핵으로 치러진 지난 5월 대선에서 문재인에게 패배한 야당들이 정부 출범 7개월이 된 지금까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다수의 힘을 빌려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현 사태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새 정부가 자신들의 계획으로 공약을 실천하고 국정을 운영해보겠다며 마련한 첫 예산을 헌법에서 정한 시한을 어겨가면서까지 붙잡고 있을 절박한 이유가 다수 야당에게 보이지 않기에 더더욱 그렇다.

 

자유한국당과 국민의당 주요 관계자들에게서 쏟아지는 말에서 더 좋은 예산안을 만들기 위한 그들의 충정은 읽히지 않고, 문재인 정부와 여당을 곤란하게 만드는 다수 야당의 힘을 뽐내며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이 그저 착각이면 좋겠다. 그러라고 헌법까지 어길 전지전능한 권한은 그 누구도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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