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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핵실험에 '아노미' 상태로 들어간 신문들

찌라시후비기

by hangil 2007. 6. 19.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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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핵실험에 '아노미' 상태로 들어간 신문들

조중동 '제재동참 촉구' 한목소리, 한겨레도 '북 책임론'


  북의 핵실험 강행이 한국 사회 주류 수구신문들을 흥분과 혼란의 아노미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여기에 이른바 ‘진보매체’라는 한겨레조차 논리적 모순과 혼란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핵실험 다음 날인 10월 10일 이들 신문에 대문짝만큼 실린 사설이 제도권 언론의 혼란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조선일보는 이날 이례적으로 1면 머리기사 옆에 통으로 <대한민국 지키는 대결단을>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원래 사설이 실리는 곳에 다른 사설을 넣고 따로 이 사설을 넣었다. 그만큼 조선일보는 ‘대결단’을 요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감정이 앞섰기 때문일까 이 사설은 온통 북과 노무현 정부에 대한 저주와 악의적 선동구로만 가득 차 있어 사설이라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수준의 ‘글’이었다.
  
  국민에게 '결단' 강요하는 조선, 전쟁하자는 의미?
  
  시작부터 왜곡을 자행했다. 이 사설은 “북한은 ‘핵실험을 하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라는 국제사회의 경고에 끝내 귀를 막았다”고 썼다. ‘다른 세상’ 운운한 경고를 과연 누가 한 것인가, 국제사회? 천만의 말씀. 바로 미국이다. 아니 미국의 국방장관으로 있는 럼스펠트의 말씀이다. ‘럼스펠트=국제사회’, 이것이 조선일보식 사고방식이다. 그들에겐 미국이 곧 국제사회요, 미국의 법칙이 곧 국제사회의 법칙이다.
  
  그 다음 이 사설은 북한에 대한 비난에 열을 올린다. 조선일보가 보기엔 북이 핵실험을 강행함으로써 “그렇게 목을 맸던 미국과의 협상 가능성도 완전히 사라졌”고 “북한의 2300만 주민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기약 없는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게 되었다. 곧 “북한 핵도박의 결론은 북한 종말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주장을 그대로 믿어보자. 그렇다면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조선일보가 그토록 원하던 북의 ‘종말’이 시작된 것이다. 조선일보가 원하는 시나리오가 실현되기 시작했음에도 웬일인지 조선일보의 ‘저주’는 그치지 않고 곧 바로 노무현 정부에게로 향한다.
  
  

△ 조선일보 10월 10일 사설. ⓒ조선일보

 북의 핵실험으로 “대한민국도 ‘다른 세상’으로 떠밀려 왔”고 “대한민국은 북핵 앞에 벌거벗은 무력한 처지”가 되어버렸는데, 이는 “이 정권이 지난 3년 반 동안 줄기차게 흔들고 외쳐댄 자주의 깃발과 ‘우리 민족끼리’ 구호” 때문에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결과”라는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을 북의 ‘핵 공갈’로부터 지켜줄 존재는 오로지 “동맹국 미국의 핵우산밖에 없다”. 조선일보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 미국은 과거의 그 동맹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작권 단독행사’를 계속 밀어붙여” 가는 이 정권은 너무나 위험하다. 그래서 조선일보는 노무현 정부에게 묻는다.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이 맨몸으로 북핵과 부딪치게 만들 것인가”라고.
  
  동북아 정세도 고민거리다. 동북아도 “역시 ‘다른 세상’을 맞게 됐”기 때문이다. 북의 핵보유는 일본의 핵무장으로, 중국의 군비증강으로 이어질 것이란다. 타당성 있는 말이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해법은 오로지 한 가지다. “국제사회는 동북아 전체를 화약고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북핵이라는 뇌관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 핵을 보유한 북한과 같은 하늘 아래서 살 수 없다고 하는 것도 그런 뜻”이란다. 여기서도 역시 ‘국제사회=미국’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북핵이라는 ‘뇌관’을 어떻게 제거한다는 것인가. 해상봉쇄인가, 정밀폭격인가. 조선일보의 ‘장담’은 무시무시하다. ‘국제사회’가 “무력제재까지 가능하게 하는 유엔헌장 7장에 따른 대북제재에 착수할 것”이라는데, 이는 “북한이 핵을 완전히 손에서 놓거나 핵을 쥔 북한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북한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될 ‘무력제재를 포함한 대북제재’는 곧 미국이 잘 쓰는 말을 빌자면 ‘북이 석기시대로 돌아갈 때까지 폭탄을 퍼붓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동맹이냐 자주냐 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며 국민들에게 ‘대결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도대체 무슨 ‘결단’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어렴풋이 떠오르긴 하지만 떠올리기 괴롭다. 조선일보는 국민들에게 ‘전쟁을 결단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인가.
  
  조·중·동의 한 목소리, '오로지 미국만이 살 길'
  
  동아는 10일 <대한민국은 비상사태다>는 하나의 사설만을 통으로 썼다. ‘비상사태’ 맞다. 누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동아의 인식은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 “북핵실험 응분의 대가 반드시 치르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조선처럼 ‘무력제재’가 가능한 유엔헌장 7장의 인용 가능성을 언급하며 “강력한 대북결의를 채택할 것”이라고 한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본격화하면 우리도 동참해야 함은 물론”이라고 못 박는다. “그렇지 않으면 북과 동류로 간주돼 고립을 면치 못한다”는 협박도 덧붙인다. 동아의 ‘국제사회’ 역시 미국과 한 단어다. 동아의 ‘동앗줄’은 “미국의 도움 없이는 북의 핵 위협에 맞서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는 우리로서는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와 한미동맹 강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밖에 없다”는 이 사설의 말처럼 ‘미국의 도움’이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난도 빼놓을 수 없다. “북을 제대로 모른 채 ‘우리 민족끼리’에 도취돼 펴온 친북 자주정책의 귀결이 지하 핵실험이었다”며 “달라진 행동으로 실패를 만회해야 한다”고 압박한다. 전작권 환수를 거론하며 “절체절명의 국가위기 상황에서 섣부른 자주를 또 꺼내선 안 된다”고 한다. 그 놈의 ‘자주’가 문제다. 하지만 ‘자주’를 문제 삼고 ‘미국의 도움’을 갈망하는 동아는 같은 사설에서 “열강이 한반도에 대한 간섭을 본격화할 경우 민족의 진로를 외세에 맡겨야 했던 100년 전 대한제국 말의 악몽이 재연될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며 코미디나 마찬가지인 정신분열증적 태도마저 보인다. 수준이 이 정도인만큼 대안이 기껏 북의 핵무장이 ‘잘못된 판단’임을 알 수 있게 하도록 “국민도 깨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치는 것도 이해해야 할까. 국민이 깨어있으면 북이 알아서 ‘잘못된 판단이었소’라며 핵을 폐기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북한 핵 앞에 벌거벗은 한국 안보>라는 사설을 쓴 중앙이라고 별반 다를 게 있으랴. 핵실험 때문에 “북한은 존립 여부가 결판날 것”이라고 ‘장담’한다. “지금이라도 핵무기를 제거하는 것이 파멸을 막는 유일한 길이라는 점을 명심하라”고 ‘충고’하지만 중앙 스스로도 ‘그냥 한 번 해보는 말’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 것이다.
  
  
△ 중앙일보 10월 10일 사설. ⓒ중앙일보

 중앙은 북에 대한 비난보다 노무현 정부를 주 타겟으로 설정했다. “노무현 대통령과 외교안보 라인이 취해 온 언동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었나가 자명해졌다”며 “나라를 운영할 능력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북한에 대해 정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며 간절히 요구하고 나선다. 그렇지 않으면 “국제적 고립은 물론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인다. 구체적으로 ‘남북경협과 교류를 동결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중앙 역시 대안이자 구세주는 ‘미국’밖에 없다.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미국밖에는 없다”고 한다. 북의 핵실험으로 “한반도의 비핵화는 이미 깨졌”기 때문에 “미국이 핵우산을 한국에 제공한다는 명시적인 입장이 나오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외교적 노력? 미국의 바짓가랑이라도 부여잡고 ‘제발 핵을 한반도에 들여놔 달라’고 애원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이처럼 조중동의 사설은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그 논리가 빼다 박았다. 북에 대한 협박, 노정권에 대한 비난, 국민들을 향한 선동, 그리고 오로지 ‘미국’. 한반도의 진정한 ‘안보’, ‘평화’, 국민들의 생명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가 없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닥쳐서조차 그 해법을 진지하게 구해보려는 노력보다 자신들의 정치논리와 색깔을 앞세우는 이들 신문을 보자면 ‘안보상업주의’라는 말이 참으로 실감난다.
  
  한겨레, 혼란에 빠지다
  
  한편, 원래 그러려니 싶은 수구신문들 외에 언필칭 ‘진보언론’ 또는 ‘개혁신문’이라는 한겨레신문의 10일 사설도 상당히 혼란스럽다. <북한의 핵실험 오판>이라는 제목의 한겨레 사설은 “북한은 도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 하나를 제외하면 당최 무슨 말을 하는 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한 마디로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인정받고 미국과의 협상에서 좀더 나은 위치에 설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 ‘오판’이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대북 정책을 크게 바꾼다는 가정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중동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한겨레라면 지금의 상황에서 이렇게 단정 지어 말하는 것이 얼마나 ‘구름 잡는 이야기’인지 알지 않을까?
  
  
△ 한겨레신문 10월 10일 사설. ⓒ한겨레신문

 당장 한겨레는 사설 뒷부분에서 “북한 핵문제는 결국 외교적·평화적인 방법으로 풀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고 만다. 북이 오판하긴 했지만 “역시 다른 나라와의 무력 대결을 바라고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고 한다. 나아가 “북한이 요구하는 미국과의 직접대화 역시 미국의 입을 통해 체제 보장을 확인받으려는 의도가 강하”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을 극복하려면 미국 정부가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전향적으로 검토하도록 애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 ‘애써야 한다’고 주장한들 무슨 소용인가. 한겨레의 본심은 후자일거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북에 대해 ‘오판’ 운운한 것은 아무래도 한겨레가 북이 핵을 실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조건을 살펴보기보다 핵실험 그 자체에 ‘화’가 나서 사설에서마저 감정을 앞세운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그런데 화가 너무 많이 난 것 같다. “세계가 걱정하는 것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약화 또는 붕괴”,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 무기의 확산은 21세기 지구촌 안보의 최대 위협 요인”이라며 “이번 핵실험은 북한을 그런 위협의 한 주체로 좀 더 구체화하는 계기”라고 한겨레는 전망했다.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단어를 고른 듯 하지만 결국 ‘북이 대량살상 무기 확산 위협의 주체가 되었다’는 의미다. 현상만 놓고 보면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겨레는 그 동안 미국 등 핵강대국이 주도하는 NPT 체제를 비판하지 않았는가. 지난 해 5월 30일자 한겨레신문은 “핵확산금지조약 무용론 등 비확산체제 위기론이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것이 핵보유국 특히 미국의 고집 때문임을 분명히 한 바 있다. 나아가 수시로 미국이 보유한 수많은 핵무기와 미국의 무기 수출에 대해 비판해왔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마치 북이 NPT 체제 붕괴의 요인인 것처럼, 미국이 주장하는 ‘북의 대량살상 무기 확산 위협’이 사실인 것처럼 북의 책임만을 거론하고 나선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한겨레는 “개별국 차원의 섣부른 대응보다는 국제사회의 중지를 모아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 즉 “협조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북한 공격론’이 나오지 않게 협조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지만, 현재 상황에서 국제사회와의 협조 강화는 유엔 결의안에 대한 참가 즉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제재 동참과 같은 의미다. 이는 남쪽만의 북과의 관계 개선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하지만 한겨레는 뒤에 이르러 “남북 관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도 시기상조”라며 “남북경협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1차로 논의되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핵심이 경제적 제재라는 것을 한겨레가 모르는 것일까. 한겨레는 사설 마지막에서 “어느 때보다도 냉철하고 현실적인 태도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한겨레에게 다시 되돌려주고 싶은 말이다.

(이 글은 2006년 10월 10일에 쓴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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