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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오보, 한국 언론이 망신 피한 건 천운

찌라시후비기

by hangil 2009. 6. 12.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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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그의 3남 김정운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를 사실로 확인해주는 증거는 아직도 제시되지 않고 있지만)이 국정원에서 흘러나오면서, 김정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일본의 TV아사히가 그동안 세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김정운의 사진이 공개됐다며 이를 보도해 국제적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결국 오보로 판명났다.

TV아사히 김정운 오보 관련 동아일보 기사

이같은 TV아사히의 오보를 두고 국내 언론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며 TV아사히를 조롱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TV아사히의 오보가 전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내가 보기에 만약 네티즌들이 TV아사히가 공개한 사진의 인물이 누구인지 금방 찾아내지 않았다면 국내 언론들 또한 얼마든지 TV아사히의 오보를 받아 "김정운의 최근 사진이 공개됐다"며 호들갑을 떨었을 가능성이 99.9%다.

어떻게 보도했을지 그 레파토리도 뻔하다.
TV아사히의 오보에 등장한 사진을 두고 '김정일 위원장과 많이 닮았다'며 머리스타일, 선글라스, 이목구비 하나하나 다 따졌을거고,  최근 김정남이 동생 김정운이 아버지와 정말 많이 닮았다고 한 말까지 인용해 김정운의 후계 세습을 아마도 확실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들 입장에서 너무나 다행스럽게, 방송의 경우는 밤 9시뉴스를 하기 전에, 신문들의 경우는 조간 신문 인쇄가 들어가기 전에 TV아사히의 사진이 언론사 자체의 취재가 아닌 네티즌들의 힘에 의해 가짜로 판명났고, 이같은 '천운'에 힘입어 TV아사히와 같은 망신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사실 확인이 10시간만 더 늦게 이뤄졌더라도 한국의 방송과 신문은 줄줄이 TV아사히의 오보를 반복했을 것이다. 이미 TV아사히의 보도 직후 인터넷에서는 한국언론의 오보가 등장했다.

TV아사히 김정운 오보 관련 조선일보 기사

그럼에도, TV아사히의 오보를 두고 TV아사히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한국 언론의 보도태도는 가소롭기 그지없다. 특히 조선일보가 "김정운도 웃을 세계적 오보 소동"라고 제목까지 달아 "조선닷컴은 이같은 사실을 오후 5시 8분, 국내 언론 중 가장 빨리 보도했다"고 TV아사히를 조롱하고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것을 보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심지어 조선일보는 "북의 후진성, 국제 뉴스의 초점이 된 김정운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북의 폐쇄성이 어우러져 빚어낸 한바탕 해프닝이었다"며 오보의 책임을 북한에 전가하기도 했다.

특히 TV아사히가 김정운 사진을 보도한 경위를 두고 '한국 당국 관계자'에서 '당국'을 빼는 등 말을 바꾼 것에 대해 "정정보도 정정소송"(동아일보), "TV아사히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연일 파문을 일으켰다"(조선일보)고 지적하는 것 또한 내가 보기엔 남사스러운 일이다.

TV아사이 김정운 오보, 한국 언론이 조롱할 자격 있나

그동안 한국언론,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보수신문들은 TV아사히 등 일본 언론들이 정체와 출처가 불분명한 북한 관련 동영상, 사진, 소식 등을 보도할 때면 자체적인 사실확인 노력도 없이 이를 받아쓰는데 누구보다 충실했다. TV아사히가 이번 김정운 오보를 낸 바탕엔 조선, 동아 등 한국언론들도 잘 받아주는 등 장사가 됐다는 배경이 분명히 있다.

호기심을 자극적하는 일본 언론들의 선정적인 보도에만 조선, 동아가 휘둘린 것도 아니다.

2006년 9월 25일은 한국 언론에 있어 '치욕의 날'로 기록돼 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미 중앙정보국을 거쳐 국무부 정보조사국(INR)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북한 전문가 로버트 칼린이 체코에서 '입수'한 '북한어 수기 자료'를 번역한 자료라며 북한 강석주 외무성 부상이 북한 외교관 모임에서 했다는 발언을 노틸러스 연구소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이 자료에는 '북 핵무기 5~6기 보유', '강경파 득세', '북미관계 사망' 등 당시로서는 충격적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이를 일요일이던 9월 24일 밤 연합뉴스가 보도하기 시작했고, 다음날 신문들이 이를 받아 저마다 "북한이 핵무기 5~6개를 보유했다"며 대서특필했다.

2006년 9월 25일 동아일보의 역사적인 '강석주 오보'. 1면에도 대서특필했던 동아일보는 이후 PDF에서 지면을 바꾸기까지 했다.

2006년 9월 25일 조선일보의 강석주 오보'


TV아사히 김정운 오보, 한국 언론에겐 '강석주 오보'가 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칼린의 이 자료는 자신이 가상으로 만들어 낸 '에세이'였다. 미국의 북한 전문가가 꾸며낸 자료를 바탕으로 연합뉴스와 국내신문들 거의 모두가 줄줄이 오보를 낸 것이다. 당시 연합뉴스는 9월 25일 새벽 5시 5분 칼린 글이 꾸며낸 것이었다며 앞선 기사를 취소하고 오전 11시 22분 사과문까지 게재했지만, 신문들의 연쇄오보를 막을 순 없었다. 이미 조간신문이 나간 뒤였기 때문이다.

국내신문들은 연합뉴스의 오보에 동참했고, 연합뉴스처럼 '사과문' 게재에도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9월 26일 조간신문에는 줄줄이 사과문이 등장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사과 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2006년 9월 26일 동아일보 사과문

동아일보는 사과문을 게재하면서도 '사과문' 자체에는 원고지 1한 정도의 분량 밖에 할애하지 않은 대신, 해명에는 6장 정도의 분량에서 "(칼린의) 원고에는 이 글이 픽션임을 밝히는 별도의 안내문 없어" 오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등 변명하는가 하면, 오보한 사실보다는 자신들이 보도한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강변하기까지 했다.

조선일보 또한 사과와 반성보다는 "북한 내부의 상황을 본 듯이 쓰고 있었고, 과거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설명이 매우 정확했기 때문"이라며 해명에 집착했다.

불과 3여년 전에 벌어졌던 일이다.

한국 언론,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보수신문들의 북한 관련 오보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금강산댐 오보', '김일성 사망설 오보', '성혜림 망명설 오보' 등 2000년 이전에도 대형 오보들이 잊혀질만하면 터져나왔고, 2000년 이후에도 '길재경 부부장 망명설', '용천역 폭발 테러설' 등 오보가 잇달았다. 2006년 '강석주 오보'는 단연 그 중 백미였다.

이랬던 한국 언론이 TV아사히의 이번 오보를 두고 먼나라 이야기인 것처럼 조롱하고 있으니, 가소롭다는 것이다. 한국 언론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은 TV아사히의 이번 오보가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들의 일이 될 수도 있었음을 분명히 자각하고, 북한 관련 보도에 좀 더 분별있게 신중하게 접근할 계기로 삼는 게 더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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