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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GOP로 배달된 한겨레, 요즘 군대에는?

코후비기(잡설)

by hangil 2009. 8. 1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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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군대에 있었을 때다.
나는 휴전선 남방한계선, 그러니깐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으로 형성된 DMZ(비무장지대)의 남쪽 철책선을 경계하는 GOP 부대에 있었다.

처음 의정부 306보충대로 입대하여 신병교육대에 입소하고, 훈련이 끝난 뒤 자대배치를 받을 때 내가 GOP로 갈 거라고는 사실 상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다 잡혀간 경험이 몇차례 있었고, 입대 직전까지도 어떤 시국사건과 관련해 불구속 수사를 받고 있던 처지였기 때문이다. 나같은 운동권 출신을 북쪽땅이 지척에서 바라다보이는 GOP로 보낸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나는 처음 자대배치를 받고 GOP 철책 경계근무를 몇달 서다 대대 행정병으로 차출되어 철책에서는 물러나 후방지휘소에서 군생활을 하게됐다.

행정병이 되고나니 이런저런 서류들을 볼 수 있었는데, 역시나 나는 '보호관심사병'이었다. 한 마디로 '보호'가 필요하고 '관심'이 필요한 사병이라는 뜻. --; 어쩐지 철책근무 설 때, 머리 긴 어떤 하사관이 나를 불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그는 다름 아닌 부대에 파견된 기무하사관이었고, 그가 나를 보호관심사병으로 관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나 그렇게 보호하고 관심가질 넘을 애초에 왜 GOP에 넣었는지는 지금 와서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어쨌든 보호관심사병이자 GOP에서 근무하던 나는 조금씩 군대 짬밥을 늘려갔고, 군생활이 익숙해지고 계급도 올라갈 무렵 모종의 계획을 세우게 된다.

내가 근무하던 후방지휘소에는 철책근무를 서는 각 소초(철책 초소 몇 군대를 담당하는 소대단위의 막사)에 보급할 물자들이 집결되는 곳이었다. 식량과 군복, 군화 등 일반적인 군수물품이 대부분이었지만, 민간인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그곳에 사회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것들도 들어왔다. 대표적인 게 편지였는데, 편지 말고 내 눈길을 끈 건 바로 신문이었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GOP 철책경계를 서는 군인들에게 매일같이 배달되는 신문은 그야말로 사회의 향기를 물씬 전달하는 매개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군인들이 신문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소식에 목말라했던 것은 아니다. 각 소초로 배달되는 신문은 십중팔구 스포츠신문이었다. 각 중대에서는 대대 인사과를 통해 신문을 신청했고, 그렇게해서 매일 연예인들의 사진과 스포츠 소식, 그리고 만화와 오늘의 운세, 숨은그림찾기 등이 실린 스포츠신문을 받아봤다.

그런데, 후방지휘소로 배달된 스포츠신문 사이에 종합일간지도 몇 부 포함되어 있는 게 내 눈에 포착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놀랍게도 한겨레신문이 한 부 있었다.

'아니, GOP에서 누가 한겨레를 받아보나?'

확인한 결과 그 한겨레는 대대장이 조선일보 등과 함께 받아보던 것이었고, 오자마자 곧 대대장 당번병 등에 의해 사라졌다. 하지만 어쨌든 군대에도, 그것도 GOP에도 한겨레가 배달된다는 사실만큼은 머릿속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일병이 되고 호봉을 조금씩 올려 상병이 될 무렵, 나는 행정병으로서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갔고,(즉 간부든 고참이든 함부로 건들지 못하게 되어갈 무렵, 참고로 나는 군수품 보급을 담당하는 군수행정병이었다), 어느날 인사과 고참에게 물었다.

"XXX 상병님, 저도 신문을 구독하려고 하는데, 구독할 수 있습니까?"

- 어. 돈만 내면 되지 뭐.

"그럼, 한겨레신문을 하나 구독하려고 하는 데 말입니다."

- 한겨레? (그러면서 날 잠시 살펴보더니) 알았어.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해서 생각보다 너무 쉽게 나는 한겨레를 GOP에서 구독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 한겨레신문을 받아들고 잠깐 읽었다가 오전일과 마치고 점심 먹고 또 잠깐 읽고, 오후일과 마치고 저녁에 내무반에서 다시 한겨레신문 꺼내서 읽는 건, 당시 너무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군대에 와서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언제나 궁금해하던 나에게 종종 고참에 의해 채널이 돌려지기 일쑤였던 뉴스데스크나 KBS뉴스로는 성이 찰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소중하게 한겨레신문을 구독한지가 한달 정도 되었을 땐가, 어느날 행정보급관이 나를 불렀다.

-야, 너 한겨레신문 받아보냐?

"예, 왜 그러십니까?"

- 어떻게 해서 보게 됐어?

"아, 그냥 그거 구독하고 싶어서, 신청했더니 넣어주던데 말입니다."

- 너 앞으로 한겨레신문 못 본다. 알았지?

"왜 그렇습니까?"

- 한겨레신문은 좀 이상한 신문이잖아. 군대에서는 그거 못봐.

"보급관님, 근데 저 말고도 한겨레신문 보는 사람 있는 거 같던데 말입니다."

- 야, 그건 대대장님 거고, 니가 대대장이냐? 잔말 말고 그렇게 알아.


이렇게 해서 돈을 한번 정도 내고 군대에서, 그것도 GOP에서 한겨레를 볼 수 있었던 지금 생각해도 특별했던 시간은 끝나게 됐고, 이후 내 주변에는 스포츠신문 아니면 국방일보 밖에 찾을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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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겨레를 보니 <오지 부대에 정론지 보내드려요>라는 기사가 실렸다.
평화재향군인회(평군)와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언소주)가 함께 '한겨레21', '시사in', '경향위클리'를 '정론주간지'로 선정해 "매일 배달이 어려워 신문 구독이 힘든 격오지에 근무하는 군 장병이나 경찰을 위해 주간지 보내기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어제 평군과 언소주는 '독도수비대'를 첫 발송지를 선정해 서울 중앙우체국에서 세 주간지를 발송했다.

참 좋은 일이다. 거창하게 '안티 조중동'을 말로만 외치는 것보다 이런 작지만 세심한 일들이 세상을 바꾸는 데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언소주(http://cafe.daum.net/stopcjd)에서는 벌써부터 '4대 정론 주간지(한겨레21, 위클리 경향, 시사인, 미디어오늘)' 구독하기 운동을 벌이고 있고, 평군(http://www.pcorea.net/)에서는 '내무반에 한겨레 보내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던 터다.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두 단체 사이트를 방문해보길 바란다.

다만 한가지 염려되는 것은 '이렇게 보내진 '정론지'들이 과연 제대로 사병들에게 전달될까'하는 점이다. 지금 대한민국 군대는 베스트셀러까지 불온서적으로 규정하는 곳이 아닌가. 어쩌면 10여년 전 나보다 지금의 군인들이 '정론지'를 보기 더 힘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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