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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TM '크리스마스 넘버원' 차지, 불가능을 가능케 한 소셜네트워크

코후비기(잡설)

by hangil 2009. 12. 21.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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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영국에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록밴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 RATM)이 영국의 음악차트에서 크리스마스 직전 일요일에 발표되는 싱글차트 1위에게 주어지는 '크리스마스 넘버원'을 차지한 것이다.

'크리스마스 넘버원'이란 개념

크리스마스 시기에 꼭 한 번씩 보게 되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는 빌리 맥Billy Mack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한 때 잘나갔던 락앤롤 스타였던 그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트로그스The Troggs의 "Love Is All Around"를 커버한 곡을 내놓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공언한다. "내가 크리스마스 넘버원 싱글이 차지하면 다 벗고 TV에서 노래하겠다!" 영화 속에서 그는 진짜로 크리스마스 넘버원을 차지하고, 영화 후반부에 그는 실제로 다 벗고 TV에서 노래를 하는 걸로 나온다.

영국 공식차트는 기본적으로 앨범차트와 싱글차트로 나눠지는데 앨범차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앨범차트고, 싱글차트는 일종의 노래순위라고 보면된다. 근데 거기는 싱글차트가 우리나라처럼 무슨 전화 투표, 인터넷 투표처럼 대표성 없는 방식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오로지 오프라인/온라인 싱글 판매량으로만 결정되며, 차트순위는 매 일요일마다 발표된다.

크리스마스 넘버원이란 크리스마스 바로 전 일요일(혹은 크리스마스 당일이 일요일일 경우 그 날)에 발표되는 싱글차트의 1위를 차지한 곡을 말한다. 그런데 이 크리스마스 넘버원은 단순히 차트 1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단, 크리스마스는 서양사회에서 가장 큰 명절이다. 최근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더 그 의미가 커져가고 있지만, 서양과 비교할 수는 없다. 서양의 경우 크리스마스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고 종교적, 문화적으로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선물을 구입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넘버원은 그 자체로 영광인 동시에, 상업적으로도 그 해 가장 많이 팔리는 싱글이 될 가능성이 높다.

(딴지일보 <[음악] 크리스마스 전쟁: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쉰 VS. 사이먼 카월>에서 인용)

바로 이 '크리스마스 넘버원'을 RATM이 차지한 것인데, 일단 그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다. RATM은 차트의 1위를 차지할만큼 대중적인 밴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웃음에도 눈물에도 좌우를 나누는 한국적 시각에서 보자면 RATM은 골수좌빨밴드다. 그들의 음악은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 자본가에 대한 노골적인 분노와 저항을 담고 있는 등 사회의식과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밴드가 바로 RATM이다. 크리스마스와는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밴드가 RATM이고, 크리스마스에 듣기에는 전혀 궁합이 맞지 않을 것 같은 음악이 바로 RATM의 노래다.

RATM의 홈페이지


이번에 '크리스마스 넘버원'을 차지한 RATM의 싱글 'Killing in the Name'은 1992년에 발표된 곡으로, 역시 미국 사회에서의 백인권력집단을 비판하며 '그들이 시키는대로 할거냐, 나는 절대 시키는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fcuk you', 'Motherfucker' 같은 욕설도 수차례 등장한다. 이런 곡이 크리스마스 주간에 발표되는 '크리스마스 넘버원'을 차지한 것이다. 이것 자체가 일대사건이다.

(RATM의 'Killing in the Name'. BBC 라디오와의 인터뷰 과정에서 진행된 공연. RATM은공연에 앞서 BBC 라디오 진행자에게 노래 가사에 담긴 욕설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만 '절대 시키는대로 하지 않겠다'는 가사처럼 욕설을 한다)

그런데, RATM의 이곡이 '크리스마스 넘버원'을 차지한 과정은 더욱 극적이고, 가히 혁명적이라 할만큼 그 의미가 더욱 크다.

'아메리칸 아이돌' 같은 뮤지션 발굴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으로 나오는 사이먼 카월(Simon Cowell)이 2005년 자신이 기획한 스타발굴 프로그램 '엑스 팩터(X factor)'의 우승자가 마지막 콘테스트에서 불렀던 노래를 크리스마스 넘버원을 노리고 크리스마스 직전에 싱글로 발매하기 시작하면서 '엑스 팩터' 우승자들이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연이어 '크리스마스 넘버원'을 차지하게 된다.

이번 2009년에도 '엑스 팩터' 우승자 조 맥엘더리(Joe McElderry)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The Climb'를 내놓았고, 그가 '크리스마스 넘버원'을 차지하는 게 거의 따놓은 당상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뜻하지 않은 캠페인이 소셜네트워크 사이트 '페이스북'에서 펼쳐지기 시작한다. '엑스 팩터' 출신들이 방송의 영향력에 힘입어 손쉽게 '크리스마스 넘버원'을 차지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두 명의 네티즌(Jon Morter와 Tracy Morter, 둘은 부부다)이 페이스북에 'RAGE AGAINST THE MACHINE FOR CHRISTMAS NO.1'(RATM을 크리스마스 넘버원으로!)라는 그룹을 개설해, "당신은 '엑스 팩터'가 크리스마스 넘버원을 차지하게 그냥 둘 것인가? 우리는 뭔가를 해야 한다"며 'RATM을 크리스마스 넘버원으로 만들자'는 캠페인을 시작한 것이다.

페이스북의 RAGE AGAINST THE MACHINE FOR CHRISTMAS NO.1' 그룹


아마도 캠페인은 캠페인일뿐, 누구도 가능할 거라고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사이먼 카월과 '엑스 팩터' 우승자들이 독식하면서 기형화되어가는 '크리스마스 넘버원'에 대한 문제의식 정도를 드러낸 캠페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캠페인은 끝내 성공하고 말았다. 아주 극적으로.

처음 캠페인이 시작되자 취지에 공감하는 네티즌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입소문이 돌고, 조금씩 매체들을 통해서도 보도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엑스 팩터'에 비해서는 미약하달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는데, 사이먼 카월이 이 캠페인에 대해 비난을 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캠페인을 알렸고, RATM도 팬들에게 이 캠페인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고, 유명한 뮤지션들도 캠페인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페이스북의 'RAGE AGAINST THE MACHINE FOR CHRISTMAS NO.1' 그룹에는 무려 9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입(현재 거의 100만에 육박하는 968,804명이 가입)하고 실제 RATM의 싱글을 구매하게 된다. 차트 발표를 1주일 여를 앞두고 RATM과 조 맥엘더리가 경쟁을 시작해 엎치락뒤치락하다, 하루 전인 토요일에 RATM이 조 맥엘더리에 만장 정도 뒤져 '크리스마스 넘버원'을 조 맥엘더리가 차지할 것처럼 여겨졌지만, 결과는 RATM 502,672장 존 엘더리 450,838장으로 52,000여장 차이로 RATM이 극적으로 크리스마스 넘버원을 차지했다.

RATM의 크리스마스 넘버원 차지를 다룬 영국 언론의 보도


이번 RATM의 '크리스마스 넘버원' 차지는 그 자체로 영미 음악계에 던지는 의미가 남다르고, 음악사적으로도 남을만한 일대 사건이 아닐까싶다. 그리고 나아가 이번 RATM의 '크리스마스 넘버원' 차지는 올해 이란의 반정부시위 과정에서 트위터의 활약과 더불어 인터넷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가능성과 영향력을 입증한 일대 혁명과도 같은 사건으로 기록될 것 같다.

크리스마스가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야 변함이 없겠지만 어쨌든 크리스마스 시즌은 온갖 상술이 펼쳐지고 대량 소비가 이뤄지는 가장 상업적인 시기라 하지 않을 수 없고 1년 중 가장 로맨틱한 때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반자본주의라고까지 할만큼 비상업적이고 로맨틱과는 극을 달리는 RATM의 음악이 넘버원을 차지했다. 바로 소셜네트워크의 힘으로.

이는 불가능이 가능해진 것과 마찬가지고, RATM이 존경해마지않는 체 게바라가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꾸자'라고 했던 그 말을 의미를 현실에서 실현시킨 것과 다름없다.

영국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나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대단히 크다. 지난해 촛불 이후 가슴 속에 꿈 하나(하나는 아니지만) 간직하며 열심히 블로깅도 하고, 댓글도 달고, 가끔 트위터도 하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자기 만족을 위해,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해 미칠 것 같아서 그걸 풀기 위해 그러기도 하고, 이걸 해서 뭐하나 싶은 냉소적인 기분을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뤄지는 SNS가 인적 교류에 많이 치중되고, 때론 마케팅의 한 방법으로 유용하게 다뤄지는 걸 보면서 어느 정도 거부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술은 쓰기 나름. 기술 발달로 가능해진 것들이 말 그대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도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철저하게 리얼리스트가 되어,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고, 더욱 열심히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자판을 두들기고, 마우스질을 하고, 연대해야겠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인터넷에서의 네트워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RATM의 '크리스마스 넘버원' 차지 소식, '크리스마스 넘버원'의 의미, '엑스 팩터'와 크리스마스 넘버원의 관계 등 이 글의 많은 부분을 딴지일보에 음악웹진 스캐터;브레인(http://www.scatterbrain.co.kr) 운영자 로그스가 쓴 <[음악] 크리스마스 전쟁: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쉰 VS. 사이먼 카월>을 참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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