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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콘 '시간여행', 가학의 늪에서 빠져나오라

쇼오락후비기

by hangil 2010. 10. 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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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 '시간여행'의 가학성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출연자(정태호)의 신체에 고통을 주고 시간을 되돌린다면서 그 고통의 강도를 갈수록 높이는 걸로 웃음을 유발하는 게 이 코너의 컨셉인만큼 벌써부터 가학성 논란이 있어왔는데, 특히 어제(10/3) 방송 이후 비판이 빗발치고 있다.

어제 방송은 군대가 배경이었고 이등병 정태호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고참이 정태호에게 날계란을 먹인다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시간을 되돌릴수록 정태호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날계란은 많아졌고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역겨웠다.

맥주잔에 가득 담긴 계란 흰자와 함께 노른자가 하나씩 정태호의 입안으로 들어가 목구멍을 타고 꿀꺽꿀꺽 넘어가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날 것 그대로의 비릿함을 고스란히 전달하기에 충분했고, 날계란을 먹기 힘겨워하는 정태호의 모습은 시청자들까지 덩달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개콘 '시간여행' 10월 3일 방송의 한장면


그런데 당사자인 정태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시청자가 가학적이라고 보는 시선이 있는 반면, 또 다른 시청자는 재미있어 한다""건강상으로나, 모든 면에서 가학적이거나 위험요소가 있다고 판단하면 절대로 개그소재로 삼지 않는다"고 밝혔다. "난 괜찮다"는 것이다.


정태호로서는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무명에 가까운 개그맨이 이제야 제법 고정코너 잡아서 "도전!"을 외치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나가는 중인데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신이 학대받는다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정태호의 반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정태호의 '항변'은 따질 수밖에 없다.

먼저 '시간여행' 코너가, 적어도 어제 방송분이 '가학적이지 않다'는 정태호의 말은 틀렸다. 자신의 건강에 위험 요소가 없다고 판단하고 "난 괜찮다"면 그건 '자학'은 아닐테지만 그렇다고 '가학성'에까지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시간여행'에서 다뤄지는 행위들이 대부분 연기자들 사이에 학대를 주고(가학) 받는(피학) 관계에서 벌어지기는 하지만 학대라는 것은 꼭 당사자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학대 행위를 지켜보는 제3자에게도 얼마든지 고통을 줄 수 있고 학대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어제 날계란을 먹는 모습이 그랬다. 정태호에게 날계란을 먹인 양선일이나, 날계란을 직접 먹은 정태호가 그 행위를 학대로 여기지 않는다고 해서 학대가 되지 않는 게 아니라 그 모습을 본 수많은 시청자들이 이미 그 행위를 학대로 규정했고, 나아가 고통을 받았다.

목이 아플 때 날계란이 좋다는 속설에 따라 날계란을 한번쯤 삼켜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경험이 없더라도 날계란이 비리다는 것쯤은 이미 상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정태호가 날계란 대여섯깨를 맥주잔에 담고 하나씩 삼키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느낌을 받아 고백컨대 정태호가 날계란을 삼키는 모습에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비위가 약한 시청자들에겐 그 모습 자체가 학대였다.

그런데 자신이 괜찮다고 가학적이지 않다니, 많은 국민이 사랑하는 TV 개그프로에 출연해 웃음을 주겠다는 연기자로서는 무책임한 반응이다.

정태호의 항변이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이런 사고가 개그프로그램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태호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어떤 강도의 학대 행위가 등장하더라도 "난 괜찮다"는 한마디로 다 무마될 수 있다는 건데, 그건 당장의 비난과 우려를 면피하는 것 외에 실제로는 전혀 괜찮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니들은 떠들어라, 나는 내 갈길을 가련다'는 건 대중에게 웃음을 주겠다는 개그맨으로서 위험한 태도다. 특히나 요즘처럼 반응이 즉각적으로 되돌아오는 시대에 시청자들의 지적과 우려를 귓등을 흘려듣는 것은 대중과 호흡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적인 개그맨으로 성공하는 데 치명적이다.

가학성 논란을 불러일으킨 '시간여행'의 또 다른 한 장면


개그프로그램에서의 가학성 논란은 한두번 벌어진 게 아니다. 그런데 논란이 벌어진 뒤에도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않는 코너는 끝이 좋지 않았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흐지부지되었던 것이다. 개콘에서만 살펴보더라도 '도레미 합창단'이나 '씁쓸한 인생' 같은 경우가 그렇다.

학대 행위 자체를 웃음을 주는 결정적 장치로 설정한 코너의 경우 갈수록 학대 행위의 강도가 심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미 보여준 행위 정도는 이미 눈에 익어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식상해지고 자극을 주려면 어쩔 수 없이 더 강한 학대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엔 가학의 늪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을 지경에까지 가서야 안좋게 끝이 나는 것이다.

신체를 학대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개그의 오래된 핵심적 코드 중에 하나인 건 분명하다. '슬랩스틱'이 가장 대표적이다. 하지만 망가지는 것 그 자체가 웃음의 전부일 수는 없다. 오히려 망가지는 모습이 의외의 상황에서 빚어질 때 더 큰 웃음이 유발된다. 현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슬랙스틱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달인'의 김병만이 보이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개콘 '달인'의 한장면


시청자들은 그동안 '달인'을 보며 김병만이 어느 정도의 어려운 과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시청자들은 그런 김병만이 어렵고 힘든 도전 과제를 성공하는 것에도 박수치지만 그보다는 의외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김병만의 애드립과 불가능해 보이는 도전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속임수를 써서 성공하는 데서 더 큰 웃음을 터트린다. 심지어 도전에 실패할 때도 관객과 시청자들은 웃음을 보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학대행위에 매달리게 되면 코너도 망치고 개그맨 자신도 결코 발전할 수 없다. '시간여행'은 이제 가학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에서부터 좋아하게 된 개그맨 정태호의 능청스러움을 다른 형식으로 접하게 되길 바란다.

정태호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게 된 첫 코너. '너무 좋아'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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