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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추억하기...보고싶다...

코후비기(잡설)

by hangil 2011. 1. 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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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무래도 김광석을 '추억'해야 할 듯 하다.
그가 떠난지 오늘로 꼭 10년하고도 5년이 더 되었다.
벌써 십....오....년....

15년 동안 여전히 그의 노래는 내 곁을 맴돌았고, 내 입안을 맴돌았고, 내 머릿속에 떠돌아다녔다.

서른이 될 즈음, '서른 즈음에'를 읊조려보지 않은 사람 그 어디 있겠나?

실연의 아픔을 겪고 난 뒤에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에 내 마음을 실어 애써 잊어려 노력하지 않은 사람 또 있을까?

군대 간 남자 중에 신병훈련소에서 뺑이치는 동안 머릿속으로 '이등병의 편지' 중얼거리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물론,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랬다.

딱 15년 전, 새해가 된지 얼마 안된 한가로운 겨울 방학의 가운데에서, 조금은 느긋하게 학생회실 따뜻한 난로 옆에 앉아 주변 사람들과 속닥속닥거릴 때, 누군가가 학생회실에 들어오며 이야기했다.

"김광석이 자살했대!"

그땐 PC통신이 주류였지, 지금처럼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지도, 속보를 쏟아내는 인터넷매체들이 있을 때도 아니었다. 한가로운 학생회실에 던져진 난데없는 '김광석 자살' 소식이란!!!

그 순간엔 슬프지는 않았다. 오로지  '도대체 왜?'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건 15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대화도 이랬다.

"자살한 게 맞대?", "응 맞대, 자기네 아파트 계단에서 자살한 채로 발견됐데나봐", "왜 그랬대?", "몰라... 왜 그랬을까?"......

슬픈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사람들은 갑작스런 그의 떠남의 이유를 캐물어야했다. 아마 내 생각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기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도 그랬으니깐.

그리고, 그날 이후 한 2주 동안 학생회실에서는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1, 2'가 CD를 바꿔가며 틀어졌고, 민중가요 노래 소리가 가득하던 학생회실에 김광석의 목소리와 그의 기타 소리가 잔잔하게 흘렀다.

난 사실 김광석이란 사람 자체에 대해 추억할 건 별로 없다. 직접 만난 적도 없고, 그의 공연을 직접 본 적도 없으니깐.

죽기 전 그는 '노찾사'를 거친 운동권 출신의 포크가수라는 정체성이 가장 강했다. '출신'이란 '이미 떠났다'는 말이고, 운동판을 떠난 사람에 대한 이미지치고 그다지 좋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김광석에 대해서만은 아무런 미움도, 아쉬움도 없었다. 오로지 그의 노래가 좋았을 뿐이다.

아니 안치환에 대해서조차 '그는 왜 지금 노래운동을 하지 않고 대중가수가 되었나'는 불만이 강했지만, 안치환보다 훨씬 더 '전투적'이지도, '운동권'스럽지도 않았던 김광석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다.

어느날 문득 뉴스에서 그가 소극장 라이브공연 1000회를 돌파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정말 대단해'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래 어디 근본도 없이 노래나 부르는 것들하고는 정말 달라'라는 생각과 함께...

그가 죽기 전, 그러니깐 1994년 여름이었다.

그 동안 공개홀 같은 실내에서 이뤄지던 'MBC 대학가요제'가 처음으로 야외무대로 나왔다. 그것도 대학 캠퍼스로. 100%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거의 확실히 아마도 고려대 노천극장에서 했던 것 같다. 당시 주철환 PD가 연출을 맡은 '대학가요제'는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군사정권 시절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대학가요제가 집회나 하고, 대동제 공연이나 하던 노천극장에서 하는 것도 신기했고, 꼭 마치 대학 노래패들 공연 보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실제로 민중가요를 부르는 고려대 노래패가 '운동권스러운' 단체옷을 입고 축하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 방송을 본 이후 남은 가장 완벽한 기억이 딱 하나가 있다. 고려대 노래패, '메아리'였나... 그 친구들이 부른 노래는 무엇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누가 무슨 상을 받았는지도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없다.

헌데, 이날 축하가수로 먼저 김광석이 나왔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김광석이 노래를 마치고 들어갈 때부터 봐 무슨 노래를 부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 뒤에 안치환이 나왔다. 안치환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렀다. 그리고 '광야에서' 부를 때였다. 무래에서 사라졌던 김광석이 다시 기타를 메고 나와 안치환과 함께 '광야에서'를 불렀다.

아∼ 감동이었다. '대학가요제'에서 '광야에서'를 듣는 것도 감동이었지만, 안치환과 김광석이 함께 한 무대를 본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무려 15년 전에 말이다.

김광석이란 사람 자체에 대해 지난 15년 동안 나의 단편적인 기억은 이렇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다. 심지어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근데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죽었대니?"라는 송강호의 대사조차도 너무나 강렬하게 남아 있다. 라디오인지 카세트인지에서 자그마하게 울려나오는 김광석의 노래와 송강호의 말이 맞닿는 순간 뭔가 가슴 속이 울컥했다. 그리고 그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15년이 되었다.
오늘도 그가 무지하게 보고 싶다.
근데, 이 감정, 아무래도 그를 보고 싶다기 보다 지나간 15년의 세월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아무래도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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