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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기자 마리 콜빈과 김재철의 입 이진숙

뉴스후비기

by hangil 2012. 2. 2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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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간 이후 회사에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노조에서 '김재철 사장을 찾습니다'며 수배전단까지 붙인 뒤에야 마침내 지난 2월 24일, 무려 25일만에 MBC에 '출근'한 김재철 사장.

그도 그지만, 그날 김재철 사장의 출근 모습이 담긴 보도 사진들과 영상에서 개인적으로 눈길이 가는 인물이 또 있었다. 바로 이진숙 홍보국장이다.

인터넷매체 민중의소리가 촬영한 동영상에 의하면 김재철 사장은 경호원에 둘러싸여 사장실로 향했는데, 얼마 전 보도본부장으로 임명된 권재홍씨와 이진숙 홍보국장과 나란히 들어가며 귓속말을 나누며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세명 모두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기까지 했다.

민중의소리가 촬영한 동영상 캡쳐 화면. 가운데 인물이 김재철, 그 오른쪽이 권재홍, 그 오른쪽 앞에서 웃고 있는 이가 이진숙


(동영상 보기 : '25일만에 출근한 김재철')

김재철 대변인 이진숙

이 세 명 가운데 나는 이진숙 홍보국장에게 가장 눈길이 갔다.
이진숙은 김재철이 낙하산을 타고 MBC에 '청소부 사장'으로 들어온 뒤 2010년 7월 대변인 겸 홍보국장으로 임명됐다.


김재철이 MBC 사장이 된 뒤 임명한 간부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자리를 바꾸거나 물러가거나 이동이 많았는데, 이진숙은 여태껏 홍보국장 자리를 지키며 MBC의, 아니 김재철의 '입 노릇'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이진숙에 대한 소회는 예전에도 한 번 포스팅에서 간단히 언급한 적이 있는데, 다시금 그에게 눈길이 가는 이유는 최근 접한 슬픈 소식 하나 때문이다.

(관련글 : 컴백 최일구 앵커에게 바라는 단 한가지)


종군기자 마리 콜빈

지난 2월 22일 정부군의 반정부세력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벌어지고, 점차 내전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시리아에서, 취재 중이던 영국 선데이타임스 소속 마리 콜빈 기자가 정부군의 포격에 의해 사망한 사건이 전세계로 전해졌다.


사망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 함께 실린 마리 콜빈의 모습은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의 왼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는 어릴 적 봤던 하록 선장을 떠올리게 했는데, 그의 표정과 한쪽 눈만으로도 꿰뚫어보듯 살아있는 그의 눈길은 왠만한 카리스마는 견줄 것이 못되었다.

올해 55세의 마리 콜빈은 언제나 현장을 중시하는 기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현장 가운데서도 위험한 분쟁 지역을 찾아가는 이른바 '종군 기자'였다. 코소보와 체첸, 동티모르, 스리랑카, 리비아 등이 그가 거쳐갔던 분쟁지역이었고, 검은 안대로 가린 왼쪽 눈 또한 2001년 스리랑카 내전 취재 땐 수류탄 파편을 맞아 잃게 된 것이었다.

군인이라도 전쟁을 치르다 이 정도의 부상을 입으면 트라우마가 생겨 두려움을 가지게 될 수 있지만, '기자' 마리 콜빈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그는 시력을 잃은 왼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리고 계속해서 분쟁 지역을 누볐고, 끝내 시리아에서 목숨까지 잃게 됐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 비극적이지만, 그의 삶은 이른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 것 같다. 물론 모든 기자가 분쟁 지역을 누비는 종군 기자 혹은 분쟁 지역 전문기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현장을 중시하며 55세라는 나이까지 현장을 누비는 그의 모습과 진정성만큼은 기자라면 본 받아야 거라 여겨진다.

영국 선데이타임즈의 마리 콜빈 헌정 기사.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많은 사람들의 글이 소개되어 있다.


(선데이타임즈 마리 콜빈 헌정기사 바로 가기 : Tributes to Marie Colvin)

자, 그렇다면 마리 콜빈의 죽음을 듣고 이진숙 MBC 홍보국장에게 다시 눈길이 간 이유는 뭘까?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이진숙은 한국에서 손꼽히는 '종군 기자'였고, 나아가 분쟁이 잦질 않는 아랍에 대해 그들의 언어와 역사까지 공부한 아랍전문기자였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해 전쟁이 발발했을 때 99%의 언론이 오로지 미국의 입을 쫓아 미국의 입장에 따라 기사를 쏟아냈을 때, 그나마 이라크에 들어가 있던 이진숙 덕분에 미국으로부터 침략당한 이라크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라크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2003년 3월 23일, 미국이 이라크 침략전쟁이 발발한지 단 하루만에 이라크 현지에서 전쟁상황을 단독보도한 이진숙 기자


극도로 편향된 전쟁 기사 가운데 이진숙이 전해오는 뉴스는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일깨워주었고,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데도 일조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세월이 흘러...MBC를 청소하러 온 낙하산 사장이 등장한 뒤 전쟁 현장을 누비던 종군기자 이진숙은 MBC를 바로 세우려는 MBC구성원들과 MBC를 MB에게 바친 사측과의 '전쟁' 현장의 최전선에 서게 됐다. 그것도 낙하산 사장 직속 최전방 공격수로.

처음엔 그가 그런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나 생뚱맞고 어색했지만, 그가 1년이 넘도록 그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역할을 너무나 충실히 하는 것을 보고, 이젠 그 생뚱맞음도 어색함도 다 사라졌다. '김재철의 입 이진숙'이 지금은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쉽고, 또 아쉽다. 이진숙에게는 MBC 구성원들에 대한 강경대응을 이야기하고, 탄압을 이야기하고, 징계를 발표하는, 그런 김재철을 지키는 최전방 공격수보다 지난해초 이라크에서부터 시작된 아랍의 민주화 현장이 훨씬 더 어울렸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진숙은 한 때 우리에겐 '한국의 마리 콜빈'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기자로서 쌓아올린 그의 가치를 이렇게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 아쉽다. 한국의 언론풍토에서 어떤 특정 분야,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쉽게 뛰어들지 않는 분야에서 한 기자가 전문성을 가지고 대중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알기에 더욱 아쉽다.

하지만, 제대로 된 방송을, 언론을 만든다면 분명히 '한국의 마리 콜빈'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진행되고 있는 MBC 노동자들의 파업, 그리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KBS 노동자들의 파업이 승리해야 한다. 단지 김재철 하나를 쫓아내고, 김인규를 내쫓기 위함이 아니라 언론을 바로세워 언론인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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