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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에게 '말걸기' 시도하는 MBC <여우야 뭐하니>

드라마후비기

by hangil 2007. 6. 19.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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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에게 '말걸기' 시도하는 MBC <여우야 뭐하니>

성(性)적으로만 논하기엔 이 드라마 아깝다

  <여우야 뭐하니>가 방송을 앞두고 있을 때 이 드라마를 바라보는 주된 시선은 크게 3가지 정도였다. 첫째 파격적인 성적 표현, 둘째 고현정의 연기 변신, 셋째 연상연하 커플. 여기에 <내 이름은 김삼순>의 극본을 썼던 김도우 작가가 이 드라마의 작가를 맡은 점이 부각되면서 김작가 특유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묘사가 ‘삼순이’에 이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을 지에 화제가 모였다. 고현정이 맡은 성인잡지 기자일을 하는 33살 노처녀 고병희가 ‘김선아의 김삼순’과 비교되었음은 물론이다.
  
  첫 회 방송이 나가고 4회가 지난 지금도 <여우야 뭐하니>와 관련해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는 ‘선정성’이다. 그 핵심에 첫 회 방송 당시 병희가 야설 속의 오빠(이혁재)와 섹스를 갖는 것을 묘사한 장면, 철수(천정명)가 병희의 손을 자기 바지 한 가운데에 얹는 장면과 3회 방송에서 역시 병희가 상상 속의 오빠와 한강변에서 카섹스를 나누는 것을 묘사한 장면 등이 있다. 물론 이밖에도 콘돔이 수시로 등장하다 못해 가방에서 우르르 쏟아지기도 하고, 자위기구에 대한 이야기, 성관계를 표현하는 대화가 이 드라마 곳곳에서 툭툭 튀어나온다.
  
  

△MBC 수목드라마 <여우야 뭐하니> ⓒMBC

  
  따라서 이 드라마를 두고 성적 묘사를 화제 삼는 것은 크게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특히 <여우야 뭐하니>에 대한 논란을 바탕으로 지상파 방송에서 성적 표현의 수위는 지금 시대 상황에서 어느 정도가 적당한 지, 15세 이상 시청가라는 등급으로 가족 시청시간대에 방송되는 게 적당한 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성담론에 대해 폐쇄적인지는 않은 지 등에 대해 적절한 사회적 합의의 계기를 마련한다면 상당히 생산적인 논란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처녀'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여우야 뭐하니>를 두고 ‘성적 표현 수위’에만 관심을 두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대단히 안타깝게 여겨진다. 특히 연예기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매체들이 앞 다퉈 이 드라마의 성적 표현을 화제 삼고, 이에 대한 시청자들 사이의 논란을 전하는 데 급급한 것은 이 드라마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여우야 뭐하니>를 ‘성적인 부분’만 중심에 놓고 본다면 놓치는 게 너무 많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 ‘노처녀의 사랑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면, <여우야 뭐하니>는 ‘노처녀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앞으로 병희와 철수의 연애이야기가 좌충우돌 그려지고 여기에 비뇨기과 의사인 희명(조연우)이 끼어든다면 이야기의 중심이 ‘연애’로 갈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병희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서사의 기본 줄기가 크게 흔들릴 것 같진 않다.
  
  이 과정이 지금까지는 드라마에서 아주 솔직하고, 오히려 ‘순진’하게 풀려가고 있다. 야하긴 야하지만 질퍽하고 지저분한 야함이 아니라 오히려 순진하고 발랄한 야함이다. 야한 성인잡지에 기자로 일하면서도 33살이 되도록 남자와 성관계 한 번 갖지 못한 ‘노처녀’가 어느 날 자궁에 혹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고 ‘자궁을 들어내야 하면 어쩌나’란 고민에 휩싸인다. 또 그 직후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선배로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을 통보받는가하면, 얼떨결에 가장 절친한 친구의 동생, 그것도 어릴 적부터 봐오던 친동생같은 녀석과 첫 경험을 갖게 된다. 인생에 있어 중요한 순간을 짧은 시간에 한꺼번에 겪게 된 이 노처녀, 드디어 스스로에 대해 아주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이다.
  
  
△MBC 수목드라마 <여우야 뭐하니> ⓒMBC

  
  여성에게 '말걸기' 시도하는 병희의 독백
  
  그래서 <여우야 뭐하니>에서는 병희의 독백과도 같은 내레이션이 수시로 등장한다. 김도우 작가의 전작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도 삼순의 독백이 ‘어록’이 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듯 <여우야 뭐하니> 역시 병희의 독백은 이 드라마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스크랩하고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올려놓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느낌이 오는’ 대사가 적지 않다.
  
  오랫도록 짝사랑하던 선배가 얼마 전 이혼한 걸 알고 만나서 술기운에 “나 선배 좋아해요. 선배랑 자고 싶어요”라고 ‘고백’이랍시고 했는데, 되려 “난 남자한테 설레었던 적은 있어. 아내랑 이혼한 것도 그것 때문이야”라는 날벼락같은 선배의 ‘고백’을 접하고 병희는 속마음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지금 선배의 고통보다 이루어질 수 없는 내 사랑이 더 슬프다. 사랑은 참 이기적이다”고. 그 선배를 공항까지 마중해 외국으로 떠나보내고 돌아오면서 병희는 “안아달라는 소리가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다. 더 이상 이성이 아니라는 게 이렇게 편할 줄 몰랐다. 생각해보니 변한 건 선배가 아니라 나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이처럼 <여우야 뭐하니>에서 병희는 사랑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심, 환상, 깨달음 등을 솔직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그 진심과 깨달음은 순진함이 있을 때 진정성있게 다가온다. 가끔은 직장 상사에게 기분좋게 대들고서는 ‘윽... 책상을 치지 말 걸. 이 나이에 직장에서 잘리면 어떻게 하지’라고 말하는 우스개스런 속마음도 그렇다.
  
  
△MBC 수목드라마 <여우야 뭐하니>의 주인공 '고병희'역의 고현정 ⓒMBC

 하지만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서 병희의 독백이 가지는 미덕은 ‘스스로에게 이야기’하는 동시에 드라마를 시청하는 같은 또래의 노처녀들, 아니 여성들에게 ‘말걸기’를 시도한다는 점이다. 산부인과에서 자궁근종 판정을 받은 병희는 “내안에 자궁이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살았다. 가벼운 두통만 와도 약을 찾아먹고 손가락에 생채기만 생겨도 그게 덧날까 요란을 떨면서도 내 안에 이렇게 소중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한 달에 한 번 자기를 봐달라고 신호를 보냈었는데... 난 벌을 받아 마땅하다. 무지한데다 무심했으니깐”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한다. 이는 곧 드라마를 보는 여성들에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궁의 소중함을 깨달으라’고.
  
  <여우야 뭐하니>의 여성에 대한 배려는 각별하다. 병희의 내레이션도 그렇지만, 산부인과에서 자궁근종 판정을 받는 과정에 ‘30살 넘도록 산부인과 한 번 찾지 않은 것은 문제다, 1년에 한 번 이상은 와라’고 말하는 의사의 말은 산부인과를 아기 가졌을 때만 찾거나, 부적절한 임신으로 부끄럽게 찾아야 하는 곳으로 인식하는 시청자들의 고정관념을 깨트리기 위한 목적의식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 산부인과 진찰 과정을 세세하게 묘사한 것은 중요한 부분을 병원에서 검사받기 무서워하는 여성들에 대한 친절한 배려로 읽힌다.
  
  재기발랄한 대사와 장치
  
  <여우야 뭐하니>에는 드라마적 재미를 유기적으로 살려주는 요소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누군가 성적인 상상을 할 때면 저음의 목소리로 반복적으로 배경에 깔리는 “야한 생각~야한 생각”, 혹은 “야한 잡지~야한 잡지~쎄시봉~” 노래는 상황의 어색함을 없애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전반적으로도 이 드라마의 BGM 설정은 아주 기발하고 재밌다. 병희가 전철에서 졸다가 오이도역까지 가고 난 뒤 조개구이에 소주를 마시며 서럽게 우는 동안 흘러나오는 ‘사랑의 이름표’(현철), ‘가라’(조혜련), ‘속깊은 여자’(유지원) 등 트로트의 연속은 그 자체가 하나의 코미디다. 그 외에 영화 <첨밀밀> 주제가를 번안한 ‘I'm still loving you’, 임현정의 ‘첫사랑’, 제이슨 므라즈의 ‘Life is wonderful’ 등도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녹아져 흘러나온다. 이밖에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부동산중개업소에 취직하러 온 남자가 ‘이 일은 적당히 거짓말도 해야 하는데’라는 말에 “10년 동안 거짓말 해왔는데요. 뭘”이라고 대답한다든지, 스쿠터를 타고 길가던 철수가 길가에 버려진 냉장고를 발견하고는 “이야 이제 2만불 시대가 온 건가. 다들 먹고 살만하네”라고 툭 던지는 한 마디, 갑자기 변정수와 명세빈이 카메오처럼 등장(이들은 <여우야 뭐하니>의 연출은 맞은 권석장 PD의 전작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주인공이었다)한다든지, 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대사와 상황이 방송 초기임에도 상당수 발견된다.
  
  그리고 고현정의 연기변신은 이 드라마의 전반적인 완성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2회에서 약 35분(실제는 더 길겠지만) 동안 술마시고, 주정하고, 울고, 토하는 취한 연기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하는 모습을 보면 대단한 연기자란 탄성이 절로 나온다. 고현정의 어리숙하면서 당차고, 순진하면서도 야한 연기는 김선아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첫 회 도입부의 고현정과 이혁재의 야한 장면과 카섹스 장면 등은 이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수위에 비해 유별나게 튀는 느낌을 주는 등 ‘선정성 논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특히 첫 회 도입부는 드라마 홍보에 활용하고 시작부터 시청자의 눈길을 잡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럼에도 회를 거듭할수록 <여우야 뭐하니>는 재밌는 드라마로, 많은 미덕을 가진 드라마로 발전하고 있다. 고대사의 영웅들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는 지상파에서 33살 성인잡지 노처녀의 이야기가 어떻게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지 앞으로의 기대가 더 크다.

(이 글은 2006년 9월 29일에 쓴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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