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홍길 대장이 출연했던 '무릎팍 도사' 두 편을 두고 시청자들의 평도 좋고, 각 매체의 평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나도 "엄홍길 편 '무릎팍도사', 색다른 '인터뷰 프로그램' 가능성을 열다"며 평가한 바 있다.
많은 시청자들은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엄 대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 찡한 감동을 전해 받았으며, 기분 좋은 웃음도 선사받았다. '무릎팍 도사'로 인해 엄 대장의 인기도 높아지고, 대중들의 관심도 커졌다.
그런데,
이렇게 지상파 방송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와 호감이 높이 치솟자마자 엄 대장은 또 다른 '구설수'에 휩싸이고 말았다.
27일 이명박 선거사무실에서 열린 문화예술지원단 임명장 수여식에서 이명박 지지를 선언한 연예인들(출처-MB캠프)
엄 대장은 27일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 후보의 경선대책위 문화예술지원단에 이덕화 등 연기자들과 함게 합류하고 문화예술지원단 상임고문으로 임명장도 받았다. 문화예술지원단은 말 그대로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이명박 후보의 경선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한 곳으로 여기에 참여한 것은 곧 '이명박 지지'를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
특히 이덕화의 경우 임명장을 받는 자리에서 "미래의 챔피언인 그에게 고백하고 싶다. 당신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챔피언이다"라며 "각하, 힘내십시오"라고 말해 많은 네티즌들로부터 '지금 시대에 무슨 '각하'냐'는 질타를 받는 등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어쨌든 엄홍길 씨가 '이명박을 지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무릎팍도사'를 통해 엄 씨에게 큰 호감을 가졌던 많은 사람들이 '엄홍길 대장이 그럴 줄 몰랐다', '나는 MB 선언한 엄홍길 말고 무릎팍도사에 나온 엄홍길만 기억하겠다'며 큰 실망감을 나타냈다.
논란이 불거지자 엄 씨는 보도자료를 내고 "특정 후보의 지지는 대자연을 경외하고 무위(無爲)를 지향하는 산악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한다"며 "이명박 후보의 캠프에 합류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즉각적인 논란 무마에 나섰다. 엄 씨가 마음 속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사적으로 지원 활동을 펼치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상 적어도 공개적인 이명박 지지는 철회한 것.
물론 연예인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도 얼마든지 특정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후원할 수 있다. 이는 민주사회에서 누구나 가지는 정치 적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80년대나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한편으로 연예인들의 정치 참여는 좋지 않은 편견에 시달려야 했고(코미디언 이주일은 국회에 들어갔다 나온 뒤 틈만 나면 '내가 가장 후회하는 게 정치인이 된 것'이라고 토로하며 당시 겪었던 여러 편견을 이야기한 바 있다), 또 한편으로는 막강한 정치권력에 의해 일부 연예인은 선거 유세에 동원되는 등 주변의 비판을 자초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문성근, 명계남 등으로 대표되는 일군의 '노사모 문화계 인사'들이 등장한 이후 문화예술계 인사는 물론 연예인들의 특정후보 지지활동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게 되었다. 박찬욱, 봉준호, 문소리 등 민주노동당 당원인 영화계 인사들은 선거 때 자신의 지지후보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데 주저함이 없다.
엄홍길 씨 역시 얼마든지 이명박이든 누구든 지지할 수 있고, 지원활동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특정 후보의 지지는 대자연을 경외하고 무위를 지향하는 산악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밝혔듯 크게 어울리지 않는 '부조화'처럼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산악인이면 특정정치세력에 대한 지지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실제 김영삼의 '민주산악회'처럼 산행을 하는 적지 않은 모임이 정치인들의 '사조직'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얼마 전 지리산을 다녀 온 뒤 범여권 대통합 참여를 선언한 손학규처럼 일부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할 때 종종 산을 오르곤 한다.
그럼에도 엄홍길의 이명박 지지는 부조화스럽게 보인다. '대자연을 경외하고 무위를 지향하는 엄홍길'이 '경부운하 건설' 등 종종 '개발독재 시대로의 회귀'로 비쳐지는 이명박을 지지하는 것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 MBC의 인기 프로그램에 출연해 산악인으로서의 순수한 모습으로 많은 대중들로부터 높은 인기와 관심을 받은 바로 그 시점에 '이명박 지지' 소식이 전해져 논란은 더 커졌다.
아울러 엄홍길 개인의 이명박 지지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이번 일을 계기로 방송에 출연하는 문화예술인(주로 연예인)들의 정치참여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볼 만 하다.
이번에 이명박 캠프의 '문화예술지원단'에 참여한 사람은 30명으로 여기에 이덕화, 이종원, 배도환, 이계인, 임대호, 정흥채, 양금석 등 탤런트들이 다수 그 이름을 올렸다. 이덕화와 양금석은 KBS '대조영'에 출연하고 있고 이계인도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발하게 방송 활동을 하는 등 그들은 대부분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그들 개인이 이명박을 지지하는 것이야 아무 문제될 것이 없지만, 특정 정치세력 지지를 선언한 사람들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지상파 방송에 출연하는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조영'에서 '설인귀'를 보고 이덕화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시청자가 이덕화가 지지하는 특정 후보를 판단하는 데 있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보기는 힘들다.
물론 후보 당사자가 아닌 이상 방송 출연을 제한하는 법적 근거가 없고, 그들이 방송에 나와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다고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정치활동을 하는 사람이 공적 매체인 지상파 방송에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같이 얼굴을 비추는 것이 전혀 문제가 없다고 보기는 또 힘들다.
지난 2002년 노무현을 지지했던 문성근은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전념하겠다'며 스스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 자리에서 물러난 바 있다. 문성근이 그만 두기 전 동아일보의 한 기자는 "특정후보의 열렬 지지자인 문씨가 SBS TV 시사다큐프로인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쓴 적이 있다. 그리고 대선이 끝난 뒤 그가 KBS '인물현대사' 진행자로 방송에 다시 등장했을 때는 선거철도 아님에도 한나라당은 '친노방송이 친노인사를 출연시킨다'며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문성근에 대한 잣대를 이덕화에게 갖다댄다면 어떨까?
사실 나도 아직 어느 게 합당한 지 잘 모르겠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