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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교수의 어중간한 양다리

코후비기(잡설)

by hangil 2009. 1. 2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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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월 29일)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경향신문에 '릴레이기고'문을 실었다. 제목은 <토건국가 발상 ‘욕망의 정치’/경제·정치에 사회마저 위기>다. 김호기 교수는 어제(1월 28일)는 중앙일보에 칼럼을 썼다. 제목은 <시장과 대통령의 거리>다.

경향신문의 기고는 '용산 참사'와 관련해 정부(또는 서울시)의 뉴타운 정책, 경찰의 강경진압, 용산참사를 대하는 보수집단의 무도덕한 태도 등을 질타한다.

중앙일보의 칼럼은 이명박 정권의 1년을 돌아보며,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시정을 할 때는 어느 정도 괜찮게 일을 했는데, 국정을 돌보는 대통령으로서 서울시장 할 때처럼 일하는 건 곤란하지 않겠냐'는 내용이다.

김호기 교수는 뉴라이트 혹은 보수세력의 시각에서는 이른바 '좌파 학자'로 규정될 만한 교수다. 반면 좌파 쪽에서는 김호기 교수를 나름 '진보적인 학자'로 보면서도 어느 정도 '친노'로 나누는 것 같기도 하다. 김호기 교수는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 국민통합분과 사회언론위원'을 지냈고, 노무현이 당선됐을 때는 '노무현대통령당선자 취임사 준비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나는 김호기 교수를 평소 '중도개혁 성향의 학자'로 보고 있다.


나는 사실 '진보입네'하는 학자들이 조중동에 글을 쓰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하지만 김호기 교수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고 봐왔다. 참여정부 시절부터 김호기 교수는 조중동에 글을 간혹 써왔고, '안티조선'에 참여한 것도 아니었다. '개혁'적 성향이 있지만, '중도'로 분류했기 때문에 이 정도의 학자면 조중동의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 글 쓰는 것을 크게 문제삼을 게 없다고 봤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오늘 중앙일보와 경향신문에 연달아 실린 김호기 교수의 글을 보고는 심기가 영 불편하다.

김호기 교수는 경향신문 기고에서 "용산 참사는 경제·정치 위기에 더해 사회마저 위기에 들어섰음을, 우리 사회 전체가 ‘3중 위기’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며 "용산 참사의 원인은 재개발, 뉴타운 사업에 이미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용산 참사는 주거의 공공성을 부정하는 토건국가 발상의 이면에 놓인 그늘을 여지없는 드러내는 동시에, 이른바 ‘욕망의 정치’로서의 뉴타운 사업이 갖는 비극을 생생히 보여준다"고도 했다.

나아가 "정부는 물론 지자체, 정치권은 이에 대한 단기적, 장기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과연 기존 방식의 재개발·뉴타운 사업을 지속할 것인가에 대한 즉각적이고 포괄적인 법적, 정책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점, "토건국가 정책이 고수되는 한 서민들은 자신이 살아온 공간을 결국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토건국가에서 복지국가로의 발상의 대전환이 요청된다"는 점 등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선출된 권력으로서의 정부는 부자들의 재산권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당연히 갖고 있지 않은가"라며 전철연을 문제삼는 정부와 공권력, 보수세력을 비판하기도 했다.

용산참사의 근본적 원인을 개발이익에만 눈이 멀어 주거권을 무참히 짓밟는 뉴타운 정책에 두는 김호기 교수의 지적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또한 '삽질경제'로 대변되는 이명박 정권의 이른바 '토건국가 정책'에 대한 김호기 교수의 날 선 비판 또한 지극히 공감한다.

그런데 문제는 앞날 중앙일보에 실린 칼럼이다.

김 교수는 지난 해 이명박 정부 인수위 당시 설날 풍경을 언급하며 고향 형님들이 "네 분 모두 청계천을 한두 번 구경 갔다 오셨을 뿐만 아니라 버스전용차로제 실시 등 이명박 시장이 남긴 성과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런데 올해 설에는 이들이 이명박 정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며 "한 사람이자 두 리더인 이명박 시장과 이명박 대통령의 거리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됐다"고 했다.

김 교수는 시장으로서 이명박의 '시정'과 대통령으로서 이명박의 '국정'을 비교하며, 서울시장으로서 "주택 문제는 서울 시정의 핵심 과제다. 더불어 교통·환경·교육 등이 앞 순위에 놓인다. 청계천 복원, 교통 체계 개편, 그리고 서울숲 건립 등은 바로 건설회사 회장 출신으로서의 이명박 시장의 역량이 잘 발휘될 수 있는 영역이었다"고 했다.

이에 반해 "국정의 우선순위는 사뭇 다르다. 외교·안보 정책과 경제 정책이 무엇보다 우선시된다"며 "시장이 기본적으로 행정가라면 대통령은 행정가인 동시에 정치가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를 다시 "시정이 주거·교통 등과 같은 몇몇 영역에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규모의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면, 국정은 국방에서 인권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책을 아우르고 조율하는 '범위의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지난 1년 동안 이 대통령은 "서울 시정과 같은 규모의 정치에 주력해 왔다"며 대운하와 4대강 정비 등 "토건국가 정책과 시장의 효율성을 특권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중심으로 소품종 대량생산의 정치에 매진해 온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타당성 있는 지적이라고 본다. '중도개혁 성향'의 김호기 교수가 쓴 중앙일보 칼럼을 어제 읽었을 때는 별다른 문제의식이 없었다. 그 정도의 학자가 할 수 있는 비판이라고 봤다. '중앙일보는 아직도 김호기 교수 글을 싣네'라는 딴 생각도 했다.

그런데, 경향신문의 기고를 보고는 두 글 사이의 괴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김 교수가 지적한 용산참사의 근본원인인 서울시의 '뉴타운 정책'이 과연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가. 김 교수가 "자가 소유 또는 주택가격 상승 같은 소박한 꿈이 이뤄질 수 있을 것 같은 뉴타운 정책에 표를 던졌지만, 정작 돌아오는 것은 살아온 ‘정든 땅 언덕 위’를 떠나야 하는 비극이 욕망의 정치가 갖는 현실"이라고 지적한 이 현실의 책임에서 '서울시장 이명박'은 과연 자유로운가.

한나라당 최고위원(송광호)조차도 용산참사에 대해 "뉴타운 현장에서 창출된 많은 부가가치를 골고루 나눠 갖지 못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뉴타운 정책을 만든 입안자가 최초의 책임자"라고 이명박 대통령의 책임을 언급하지 않았나.

즉, 김호기 교수는 경향신문에서는 서울시와 정부의 뉴타운 정책을 문제삼으면서도 한편으로 중앙일보에서는 "청계천 복원, 교통 체계 개편, 그리고 서울숲 건립 등은 바로 건설회사 회장 출신으로서의 이명박 시장의 역량이 잘 발휘될 수 있는 영역"이었다며 마치 시장으로 이명박이 꽤나 훌륭하게 '규모의 정치'를 펼친 것처럼 썼다.

물론 김 교수의 의도는, 국정을 책임진 이명박 정부의 지난 1년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기 위한 하나의 비교 대상으로 '이명박 시장'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울시장 이명박'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욕망의 정치'로 내몬 뉴타운 정책에서 과연 이명박은 자유로운가? 청계천을 복원하기 위해 노점상들을 무참하게 내쫓은 서울시장 이명박의 모습은 과연 용산참사가 벌어진 지금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수구족벌신문 중앙일보에서는 날선 비판을 삼간 채 두루뭉수리하게 에둘러 지적하고, 진보적 매체인 경향신문에서는 '토건국가'의 야만성을 날세워 비판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적잖이 불편하다.

김 교수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우리 사회는 경제·정치·사회 위기에 더하여 ‘도덕 위기’마저 겪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정말 같은 사회,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라고 했다. '삼중의 위기'를 겪고 있는 그런 사회,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학자라면 어중간하게 자신을 포지셔닝할 게 아니라 태도를 더욱 분명히 해야 하는 게 아닐까.


 ....

우리는 시내를 향해 길을 나섰다. 역 정문에는 총검으로 무장한 병사 두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1백여 명의 기업인과 공무원, 학생 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람ㄷ르은 그들에게 격하고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다. 병사들은 꾸지람을 당하는 아이들처럼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학생 교복을 입은, 큰 기에 거만해 보이는 한 청년이 병사들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형제들에게 무기를 들이댐으로써 결국 살인자*반역자 들의 도구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청년이 내뱉듯이 말했다.

"이봐요, 형제들." 병사는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가 있지요. 우리는 ......"

"아, 나도 그 어리석은 이야기를 알고 있지!" 학생은 험악한 말투로 병사의 말을 끊었다. "몇몇 무지한 농민, 바로 당신 같은 이들이 누군가 떠들어 대는 몇 마디 구호에 귀가 솔깃해진 것이죠. 당신은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들은 대로 읊조릴 수 있을 뿐이죠, 앵무새처럼." 군중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하는 학생인데, 내가 볼 때 당신들이 옹호해 싸우고 있는 것은 사회주의가 아닙니다. 친독일적 무정부주의에 불과해요!"

"아, 알아요." 병사는 진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당신이 교육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이 오히려......"

이때 또 한 사람이 병사의 말을 가로막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레닌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친구라고 믿는 것 같은데?"

"예, 그래요." 병사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이봐요, 친구. 당신은 레닌이 비밀 차편으로 독일을 거쳐 러시아로 보내진 것을 알고 있소? 레닌이 독일 정부에게 돈을 받은 것도 알고 있는 거요?"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는 내가 듣고자 하는 것을,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더군요. 러시아에는 두 계급이 있습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바보 같으니. 이봐요, 친구. 당신들이 혁명가들을 쏴서 넘어뜨릴 때, '신이여, 짜르를 구하소서!' 하고 노래하고 있을 때, 나는 슐리셀부르크에서 2년간 혁명 활동을 한 사람이오. 내 이름은 바실리 게오르게비치 판닌이오.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죠?"

"미안하지만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병사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난 교육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대단한 영웅인가 보군요."

"나는 볼셰비키에 반대합니다. 볼셰비키는 우리 러시아와 우리의 자유로운 혁명을 파괴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학생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나는 그것을 전혀 설명할 수 없어요." 병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는 지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내 눈에는 간단한 문제로 보입니다. 비록 나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지만, 세상에는 두 계급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가......"

"당신은 어리석은 공식만 되풀이하고 있군요!" 학생은 소리쳤다.

"오직 두 계급이 존재하지요." 병사는 완강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어느 한쪽이 아니라면 다른 쪽에 속한 것이지요......."

.......


-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 214~216p


* 이 글을 인용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구하는 계급론자로 규정해 '좌빨'이니 어쩌고저쩌고 하는 댓글을 정중히 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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