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이 정연주 사장에게 보낸 자필 편지
오마이뉴스에 지난 8월말부터 1주일에 한번 정도 꼴로 정연주 '전' KBS 사장(정연주 사장은 지금 당연히 KBS 사장 자리에 앉아 있어야 마땅한 인물임으로 전 사장이 아니라 사장으로 표기한다)이 쓴 글이 '특별기획' 형식으로 연재되고 있다. 제목은 '정연주의 증언'이다.
연재의 첫 시작은 정 사장이 엄기영 MBC 사장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였다.
그리고 이어, '증언1'로 <"명예로운 죽음으로 역사에 기록되라"/리영희 선생 격려 편지에 가슴이 저렸다>라는 제목의 글이 게재됐고, 오늘 '증언 2'로 <바위처럼 내 자리 지키려고 했는데...>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우리나라 최대 방송사의 사장직에 있었던(지금도 있었어야 할) 사람이 얼마 전까지 있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글들로, 쉽게 접할 수 없는 글들이다.
'증언1'에서는 제목에서처럼 리영희 선생께서 정연주 사장에게 보낸 편지도 볼 수 있다. 건강이 안좋으셔서 편치 않은 몸임에도 정연주 사장에게 "지금 나는 정 사장의 모습에서 이순신 장군을 보고 있는 느낌이오. 반 민주주의 집단의 폭력과 모략으로 꺾이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명예롭게 소임을 다 하시오"라며 "명예로운 죽음으로 역사에 기록되기를 바라오"라고 직접 펜을 들고 글을 써서 보낸 것을 보며 가슴 한켠이 아리기도 했는데, 오늘 등록된 글을 읽으니 연말 방송사 시상식이라든지, 드라마 연기자와의 만남 등에서 '사장'으로서 겪은 뒷이야기들도 들을 수 있으니, 짬이 되는 사람들은 일독 해보길 권한다.
그런데, 오늘 등록된 글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그대로 옮겨본다.
차아무개 본인의 말을 인용하자면, 정 사장 취임 뒤 'KBS 발전협의회'라는 것을 꾸려 대표직을 맡아 정 사장을 비판해오던 자신에게 정 사장이 '외부에서 비판하지 말고 문제를 제기할 게 있으면, 보직을 맡아서 해달라. 잘못된 것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라며 시청자센터장 보직을 제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름이 더욱 유명해진 일이 있었다.
2007년 11월 21일. KBS에서는 대선후보초청토론회 '질문있습니다!'의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편 생중계가 준비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후보와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미리 도착해 토론을 준비하고 있던 스튜디오에 몇명의 KBS 간부들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대선후보토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시청자센터장' 차아무개씨도 있었다. 당시 언론보도에 의하면 차아무개 센터장은 방송직전까지 이명박 후보 곁에 붙어 있다가 "자연스럽게 하세요"라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이후 KBS 사내게시판에는 차아무개 센터장에 대해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 관련한 연설, 토론회 방송이 있을 때만 나타난다", "이 후보측에 마치 눈도장을 찍으려고 하는 모습" 등의 비판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처럼 사내 비판 여론이 비등해지자 차아무개 센터장은 2007년 12월 12일 기자회견까지 자청해 "본인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끝까지 인내하고, 대화를 통해 KBS를 바로 세우는 데 일조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정연주 사장을 비롯한 그 추종세력들의 비열한 작태가 집요하게 반복되는 것에 한계를 절감하며 이제 만시지탄의 심정으로 시청자센터장 보직을 떠나고자 한다"며 정 사장에게 온갖 비난을 퍼붓고 스스로 시청'자센터장을 사퇴한다. 그리고 이날 기자회견에서 주장한 내용들이 간부로서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다 하여 KBS는 인사위원회를 열어 6개월 정직 처분을 내린다. 당시 차아무개씨는 정년이 6개월 정도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와 그의 기자회견문을 다시 살펴보니 재밌는 구절이 발견된다. 정 사장과 관련해 "정사장의 후안무치함은 일찍이 잘 알려져 있다"며 "게다가 어제 확대간부회의에서 정사장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아무리 바깥바람이 불어도 바위처럼 자리를 지키겠다'며 그의 권력욕을 여지없이 드러냈다"고 쓴 구절이다. KBS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바위처럼 자리를 지키겠다고 한 정 사장의 말을 차아무개씨는 '권력욕'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 잊혀져가던 차아무개의 이름은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다시 등장한다. 경북 문경·예천의 한나라당 후보 공천을 신청한 것이었는데, "자연스럽게 하세요"라고 조언까지 했음에도 뭐가 부족했는지, 그는 공천에서 탈락한다. 그리고는 1년 넘게 그의 존재는 사실상 사라졌으나, 최근 다시 한번 회자됐다.
8월 29일 조선일보 기사
지난 8월 29일 조선일보에는 <KBS 전·현 간부들 "권력과 친분" 돈뜯어>라는 기사가 게재된다. 조선일보에 의하면, 차아무개씨는 총선 직전 모 건설업체 대표에게 "프랑스 뮤지컬 공연단 초청사업을 하면 KBS가 도와주게 할테니 출마를 도와달라"고 부탁해 1억원 상당의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은 혐의와 대선 직후 이명박 후보에게 당선축하금을 줘야 한다며 역시 같은 사람에게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검경의 수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S씨는 차아무개 등에게 돈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돌려주지 않아 청와대에 진정을 냈다고 한다. 이틀 뒤 동아일보는 차아무개씨가 3000만원을 돌려주고 합의를 봐 불구속기소됐다고 보도했다.
쓰다보니 꽤나 장황해졌다.
그런데 이야기하고 싶은 핵심은 간단하다.
정연주 사장은 권력 교체기에 KBS에 닥칠 위기를 예감하고 "바위처럼 자리를 지키겠다"고 했지만, 끝내 KBS사장 자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를 사장 자리에서 밀어내는데 결정적 구실을 했던 배임혐의가 무죄로 결정났다. 사실상 '정연주 해임'이 불법이고 무효라는 게 증명된 것이다. 자리를 지킴으로써 정권의 KBS 장악을 낱낱히 폭로했고, 끌려나옴으로써 정권의 KBS 장악은 표면적으로 완성되었지만 정연주는 진실과 정의의 이름으로 여전히 살아있고 재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사장의 그런 발언을 들으며 "권력욕을 여지없이 드러냈다"고 했던 차아무개씨는 이명박 후보 곁을 얼쩡거리다, 그 인연으로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다 탈락하는가 하면, 무슨 자격인지는 모르겠으나 건설업자로부터 '대통령 당선축하금'을 뜯어내고, 자신의 출마자금을 받아내고 향응을 제공받았다.
"KBS를 바로 세우는 데 일조하고자 노력"했다는 차아무개와 "KBS 정치적 독립성"을 위해 바위처럼 자리를 지키겠다했던 정연주 사장. 둘 중 누가 과연 진정으로 KBS를 위한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과연 누가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일까?
빛이 어둠을 밀어내고 세상을 비추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릴 줄 알았더니, 1년 남짓만에 진실은 드러났고, 역사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나저나 정연주 사장은 다음주 차아무개와 관련해 어떤 글을 이어가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