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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혈서, 역시 조중동엔 없었다. 대신 중앙·동아는

찌라시후비기

by hangil 2009. 11. 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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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가 만주국 군관을 지원하면서 혈서를 썼다는 내용이 담긴 만주신문의 기사를 공개했다. 그동안 '설'로만 회자되던 박정희의 '혈서지원'이 이로써 사실로 입증됐고, 박정희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도 더 이상의 군말이 나올 수 없도록 쐐기를 박게 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만주신문의 박정희 혈서 관련 기사


그런데, 그냥 '박정희의 친일이 입증됐다'고만 하기에도 공개된 박정희의 혈서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만주신문은 <혈서(血書) 군관지원/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라는 제목 아래 혈서와 함께 동봉된 박정희의 편지 내용을 요약해 소개했는데, 여기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라는 박정희의 일제에 대한 충성 서약의 내용이 담겨 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만주국군에 채용시켜 달라"고 애걸하는 모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과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를 밝히는 다짐,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라는 일제를 향한 청년 박정희의 간절함, 그리고 심지어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까지 밝히고 있다.

개나 말처럼 충성을 다하겠다니... 이런 사람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나라의 국군 장교가 되었고, 급기야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자리까지 차지해 30여년 동안 독재를 했다.

이는 충격적이지만 모든 국민이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다. 하지만 예상했던대로(솔직히 '설마, 이 정도는 조금이라도 쓰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다) 조중동은 박정희의 혈서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중앙일간지 9개 신문 가운데,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물론, 한국일보와 국민일보, 세계일보까지 다 박정희의 혈서를 기사화했지만 조중동은 쓰지 않았다(서울신문에도 관련기사가 없었다).

한국일보

한겨레

국민일보

세계일보

경향신문


대신 동아일보에는 영상뉴스팀장이라는 박제균이 쓴 칼럼 <우장춘과 도고 시게노리>가 게재되었는데, 박제균은 "납치된 조선 도공의 후예가 '일본국과 일본 국민'을 구하고, '조선 국모 시해범'의 자식이 불모의 한국농업 재건의 기초를 닦은 이 부조리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여기서 '조선 도공의 후예'는 '도고 시게노리',  '조선국모 시해범의 자식'은 우장춘)라며 친일파 논쟁을 잔뜩 물타기한 다음,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동아일보


"8일 발간되는 친일인명사전에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룬 고 박정희 대통령과 우국의 절창 시일야방성대곡을 남긴 위암 장지연 선생이 포함됐다고 한다. 친일문제에 그렇게 단세포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것을 한일고나계의 격랑 속에 얽힌 우장춘과 도고 시게노리의 삶이 웅변한다"라고.

일제에 '견마의 충성'을 다짐한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에 포함시키는 것이 "단세포적 접근"이라는 것이다.

중앙일보


또 중앙일보에는 논설위원을 맡고 있는 노재현의 <'입맛대로' 친일 인명사전>이라는 칼럼 게재되었는데, 노재현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갈 명단에 의문을 표하며, 박정희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썼다.

"명단에 포함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만군에 배속돼 1944년 7월 만리장성 너머 열하성 반벽산의 보병 제8단에 배치됐다. 주적은 중국 팔로군이었다. 그는 부관으로서 작전명령을 전달하고 부대 깃발을 관리했다. 여러 자료·증언을 종합하면 실제 전투에는 참가한 적이 없다."

노재현의 주장은 해방 직후 설립된 반민특위에서도 '악질적 친일행위'를 단죄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박정희의 행적은 '악질적이지 않다'는 것이며, 노재현은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내가 보기엔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의 이데올로기 다툼과 정쟁에 이바지한 꼴이 되고 말았다. 작업의 편향성, 자의성 때문이다"라고 폄훼했다.

혈서까지 써서 일사봉공, 견마의 충성까지 다짐한 사실은 외면하면서 기껏 이들이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한다는 소리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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