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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영 사퇴 이후, 'PD수첩'이 가장 위험하다

코후비기(잡설)

by hangil 2010. 2. 8.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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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문화진흥회가 한동안 공석이던 보도/제작/편성본부장을 김우룡 방문진 이사장의 의중대로 임명했다.

엄기영 MBC 사장은 이에 반발해 "MBC 사장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엄 사장은 특히 "할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접겠다"면서도 "방송문화진흥회 존재 의미에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도대체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방문진에 대한 분노어린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방문진의 일방적인 MBC 본부장 임명에 항의해 사퇴 입장을 밝히는 엄기영 사장. 출처-PD저널


방문진이 임명한 본부장들 모두가 방문진의 일방적인 임명에 의해 발탁된만큼 문제 투성이지만,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윤혁이라는 사람이다. 제작본부장에 임명되기 전 '시사교양국 부국장' 자리에 있었던 윤혁은 MBC의 이른바 '선임자노조'에 몸을 담은 인물로 알려졌다. 선임자노조는 부장직급 이상의 MBC 직원으로 구성된 '공정방송노동조합'을 일컫는 용어인데, 최문순 사장 시절 최문순 사장의 MBC 운영에 반발한 사람들이 만들었다.

독설닷컴에 고재열 기자가 MBC의 한 기자로부터 선임자노조와 관련해 들은 내용을 옮겨놓은 글을 조금 인용해보자.

MBC의 선임자 노조는 조직 결성 시기가 순수하지 못했다. 엄기영 전 최문순 사장 시절 부장급인 최문순 부장이 사장으로 올라서면서, 사실상 물먹은 부장, 국장들이 대부분이다. 최 전 사장은 약 10여기수를 뛰어넘어 사장이 됐다. MBC에 같은 기수가 평균 20~30명 정도씩 된다고 볼 때, 약 200-300명 정도가 후배인 최문순 사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법원이나 검찰 조직같으면, 다 변호사 개업했겠지만, 그들은 후배 밑에서 월급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심리적 박탈감을 해소하기 위해 함께 뭉치게 된 것이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 뭉친 것이다. MB 식 표현대로라면, 밥그릇 지키려고 만든 노동조합이 바로 그들이다.

- '독설닷컴(한 MBC 기자의 선배 비판, "친일파와 뭐가 다른가?") 중


하나만 더 인용해보자.

1990년대 이후 MBC에 입사한 라디오 PD들이 2009년 2월에 낸 성명의 일부인데, 다음과 같다.

극소수의 소위 '공정방송노조' 집행부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과 사내외의 발판을 위해 나머지 '공정방송노조' 조합원들을 이용하려는 작태를 당장 중단하라. 특히 사내 기밀서류까지 극우 신문에게 팔아넘긴 집행부 모 인사는 방문진에 진출을 공공연하게 전파하고 있고, 일부는 사내 주요보직 획득을 위한 로비에 골몰하고 있다고 한다. 만약 이런 공작행태가 사실이라면 이는 그들이 다수의 MBC구성원들과 회사를 수차례 배신한 데 이어, '공정방송노조' 구성원들까지 배신하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는 바이다.

- 90년대 이후 MBC에 입사한 라디오 PD들의 성명 <소위 '공정방송노조' 집행부의 명백한 해사 행위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회사에 촉구한다> 중

윤혁은 바로 이런 조직에 몸 담은 사람으로, 그가 MBC 제작본부장에 임명된 지금 가장 우려되는 것은 무엇보다, 'PD수첩'을 없앨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는 점이다. 방문진이 친이명박 성향의 이사들이 다수를 차지한 직후부터 이미 'PD수첩' 폐지 내지 순치를 기치로 내건 것처럼 손보기를 시도해왔다. 최근까지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방송과 관련해 'PD수첩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등 'PD수첩' 폐지를 위한 수순밟기를 노골적으로 진행해왔다. 만약 PD수첩 재판 결과가 지금과 달랐다면 방문진은 즉각 PD수첩을 폐지하든지, 제작진을 일괄 교체하라는 요구를 현실화시켰을 것이다.

그런데, 진상조사위가 사실상 물 건너 가게 되자, 방문진은 본부장을 이용해, 그리고 이제 그들의 목표대로 엄기영 사장이 사퇴하게 되자 낙하산을 내려보냄으로써 'PD수첩'을 없애는 것 등은 물론 MBC를 완벽히 장악하려고 하는 것이다. 윤혁이 차지하게 된 제작본부장은 'PD수첩' 등 시사다큐프로그램을 총괄하는 자리다.

방문진은 이런 일을 꾸미라고 있는 곳이 결코 아니다.

방송문화진흥회의 존립근거가 되는 '방송문화진흥회법'에 의하면, 제1조 '목적'에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이 법은 방송문화진흥회를 설립하여 방송문화진흥회가 최다출자자인 방송사업자의 공적 책임을 실현하고 민주적이며 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의 진흥과 공공복지향상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방문진이 최대출자자인 방송사업자'란 MBC를 일컫는다. MBC 지분의 70%를 방문진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방문진은 MBC의 공적 책임을 실현하고 민주적이며 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의 진흥과 공공복지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방문진법이 규정한 방문진의 '업무' 중 MBC와 관련되어서는 "진흥회가 최다출자자인 방송사업자의 경영에 대한 관리 및 감독"이 유일하고, 방문진 이사회의 '기능'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이사회는 다음 각호의 사항을 심의·의결한다.
   1. 예산, 자금계획과 결산
   2. 기본재산의 취득 및 처분
   3. 정관이 정하는 규정의 제정 및 개폐
   4. 정관의 변경
   5. 진흥회가 최다출자자인 방송사업자의 공적 책임에 관한 사항
   6. 진흥회가 최다출자자인 방송사업자의 기본운영계획에 관한 사항
   7. 진흥회가 최다출자자인 방송사업자의 결산 승인에 관한 사항
   8. 진흥회가 최다출자자인 방송사업자의 경영평가 및 공표에 관한 사항
   9. 진흥회가 최다출자자인 방송사업자의 정관변경 승인에 관한 사항
   10. 기타 이사회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

방문진법 그 어디를 살펴봐도 방문진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MBC 경영진을 임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 물론 MBC 사장을 방문진이 임명하기는 하지만, 사장 아래의 간부들까지 방문진이 자기들 멋대로 임명하는 것은 법의 규정 유무를 떠나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뭐하러 사장을 뽑나, 그냥 방문진이 알아서 MBC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무르면 되는 것을. 방문진이 지금 저지르고 있는 일들은 '소유/경영/제작/편성의 독립'이라는 민주 사회 방송사의 기본 운영 원칙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이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은 KBS를 장악하기 위해 신태섭 이사를 내쫓고 KBS 이사회를 장악한 뒤, KBS 이사회를 통해 정연주 사장을 내쫓고, 이어 낙하산 사장을 앉힌 뒤 '시사투나잇'을 없애고, '미디어포커스'를 없애고, '탐사보도팀'을 사실상 해체했다. 그리고 이제 KBS는 사실상 정권홍보방송으로 전락했다.

2010년 이명박 정권은 MBC를 장악하기 위해 벌써 방문진을 장악했고, 방문진을 통해 낙하산 간부를 앉혀 엄기영 사장을 사퇴하게 만들고, 이제 곧 낙하산 사장을 내려보낼 것이다. 이미 몇몇 이름들이 떠돌고 있다고 한다.

KBS가 방송한 '한국 원전수출 기념 열린음악회'


그리고 그 다음 'PD수첩'이 이름이 바뀌든 제작진이 바뀌든 아예 없어지든지 시도가 이뤄질테고, '뉴스후', 시사매거진 2580' 등에 대한 손보기도 이뤄질 것이다. 그러고 나면, MBC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어디다 원전을 수출했을 때 어쩌면 '원전수출 특집-라라라'를 할지도 모를 일이고, '무릎팍도사'에 세종시 전도사 정운찬 총리가 출연할지도 모를 일이고, '일밤'에서 4대강 특집을 '강을 살리자'를 할지도 모르겠다.


호들갑 떠는 것처럼 보이는가? 지금 KBS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MBC의 미래가 눈에 보인다. 방문진이 하는 일들을 그대로 두면, 저 미래는 현실이 될 것이다.

호소하고 싶다. 'PD수첩'은 결코 MBC만의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를 위해 'PD수첩'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PD수첩'이 사라질 날은 'PD수첩'이 지금처럼 다룰 내용이 사라질 때이다. 아직 그 때가 아니다. 한국 사회를 위해, 시청자를 위해, 궁극적으로 나를 위해 PD수첩은 있어야 한다. 그리고 MBC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 기능이 살아있는 방송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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