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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은 추억으로 끝내자

찌라시후비기

by hangil 2008. 4. 1.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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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 발생한 일산 초등생 폭행 및 납치미수 사건의 용의자가 31일 저녁에 붙잡혔죠.
사건 발생 5일만입니다.
그에 앞서 31일 오후에는 이명박 대통령께서 몸소 친히  일선 경찰서를 방문해 경찰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함 쬐려 봐줬고, 약 6시간 만에 용의자는 총출동하다시피한 경찰들에게 잡혔습니다.

서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52개 생필품 목록을 정하도록 '교시'를 내리지 않나, 범인 검거까지 진두지휘하시질 않나 정말 대단한 대통령입니다. 한동안 '과장같은 대통령'이라는 말이 떠돌더니 이번엔 '파출소장급 대통령'이란 말이 나오더군요~

그러자, 다음날 아침, 그니깐 오늘(4월 1일) 조중동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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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의 활약을 대서특필한 거죠.
이 기사만 보면 마치 이 대통령이 범인을 잡은거나 다름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국민들이 경찰들의 행태에 크게 분노한만큼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제대로 된 수사를 독려하고 나선 것은 전혀 나쁘지 않을겁니다.

다만, 한겨레가 사설 <얼빠진 경찰, 본분으로 돌아가라>에서 ‘등록금 인상 반대집회’ 때의 경찰 대응을 거론하며 “지휘부의 관심이 온통 시국치안에 쏠렸으니, 민생치안이 안중에 있을 리 없다”고 지적하고, 특히 “경찰을 그런 방향으로 이끈 이가 ‘법질서’를 강조한 이명박 대통령”이라며 “그런 그가 이제 와 경찰을 꾸짖고 있으니 어색하기 그지없다”고 비판한 것처럼, 지금 판국에 이명박 대통령이 나서 경찰의 민생치안 부실함을 꾸짖는 건 어째 궁합이 요상합니다.

경향신문은 <연일 전시성 캠페인 ‘거꾸로 가는 경찰’>이라는 기사에서 “경찰이 전시 행사에 집중하는 동안 민생치안에는 허점이 노출됐다”며 “평화시위를 진압할 경찰 병력은 있어도 어린이 범죄에 대처할 여력은 없느냐”는 시민단체 관계자의 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지적처럼 이번 사건은 유독 ‘법질서’를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경찰이 ‘체포전담반 신설’, ‘시위진압 경찰 면책 부여’, ‘집시법 개정’ 등 이른바 ‘시국치안’과 관련한 강경책 마련에 여념이 없는 동안 정작 최우선 본분이라 할 수 있는 민생치안은 어떻게 구멍이 뚫리고 있는 지 여실히 드러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안양 초등생 납치살해 사건 이후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명박 대통령은 3월 22일 ‘어린이 대상 흉악범죄 방지책 마련’을 지시했고 26일, 어청수 경찰청장은 ‘어린이 납치·성폭행 종합 치안대책’이라는 것을 발표했죠. 바로 그날 일산에서 초등생 납치 미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년에 1,000만원이 넘는 등록금 폭등을 참지 못해 거리로 나온 학생들의 평화집회에 ‘체포전담반 투입’을 엄포 놓고 집회참가인원의 두 배에 달하는 1만4천여명의 경찰병력을 동원하는 동안 일산 초등생 부모는 직접 전단지를 붙이고 다녔습니다.

대운하를 반대하는 교수들에게 정보과 형사를 보내 ‘학원사찰’을 실시하고, 야당 정치인의 선거유세 현장에 정보과 형사를 보내 ‘경호’하는 동안 여기저기서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거죠.

저는 이것을 보며 시위진압에 경찰력이 총동원되는 바람에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막지 못한 영화 <살인의 추억>의 비극적인 코미디 같은 장면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그려진 80년대 경찰의 현실이 당시 5공 군부독재정권의 민주화운동 탄압 때문이라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경찰의 민생치안 외면의 배경에는 “국민들이 ‘떼를 쓰면 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법과 질서를 제대로 지키기만 해도 GDP 1%는 올라갈 수 있다”고 ‘법질서’를 강조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인식이 자리 잡고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또 하나 문제는, 이런 이 대통령의 ‘법질서 인식’을 집회시위에 대한 강경대응을 주장해 온 보수신문들이 부추겼다는 겁니다. 그동안 무슨 집회를 하거나 시위만 하면 보수신문들은 항상 쌩난리를 부렸고, 여기에 보수단체들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였죠. 이들의 기대를 가득 안고 탄생한 이명박 정부가 '법질서 강조'를 내세우는 것은 당연할 겁니다.

보수신문들은 4월 1일 하나같이 격한 어조로 경찰을 비난했습니다.

조선일보는 사설 <경찰, 무능한 건가 넋이 나간 건가>에서 “이 정도면 경찰관의 유·무능 여하나 성실성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경찰관들의 지능을 검사해 봐야 할 판”, “정말 구제불능 경찰이랄 수밖에 없다”며 모독적인 언사까지 동원해 경찰을 비난했습니다.
 
중앙일보 또한 사설 <경찰, 변할 수 없는 조직인가>에서 “경찰이 무사안일과 구습에 빠져있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겠다”며 “경찰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 임무를 못한다면 줄이거나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동아일보도 사설 <이런 경찰 믿고 어떻게 아이 키우나>에서 “이런 조직에 치안을 맡겨야 하는지 분노가 치민다”며 “범죄예방에 무심하고 범인 안 잡는 경찰 조직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경찰을 질타했습니다.

하지만 보수신문들의 사설에서 시국치안에 역량을 집중시키는 경찰을 지적하는 내용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보수신문들은 경찰이 대운하 반대 교수들에 대한 정치사찰을 했을 때도 이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경찰이 이 정부 출범 이후 보인 모습을 바꾸지 않고 ‘시국치안’에만 골몰해 ‘백골단 부활’ 따위에만 신경을 쓴다면 앞으로도 민생치안은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럴 경우를 예상해 민언련이 4월 1일 발표한 논평(<민생치안 걱정되면 ‘시국치안 몰입’부터 비판하라>)에서 잘 짚었네요.

"이 구멍을 메우지 않은 채, 흉악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대통령이 일일이 경찰서를 찾아 경찰을 질타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앞으로 어린이나 여성 대상 범죄가 발생하고 미궁에 빠지거나 용의자가 붙잡히지 않으면 이 대통령께서 항상 일선 경찰서로 출동하실지 아주 궁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격한 어조로 경찰을 비난한 보수신문들의 보도는 민언련의 지적처럼,

"합리적인 언론이라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민생치안을 위해 대통령과 정부, 경찰수뇌부, 그리고 일선 경찰들이 각각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냉정하게 따지고, 그것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보수신문들의 ‘민생치안’ 보도는 함량미달이다."

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군사독재정권 시절도 아니고 '살인의 추억'은 정말 이제는 '추억'으로 끝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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