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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여영을 응원한다

코후비기(잡설)

by hangil 2009. 9. 2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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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30일, 중앙일보에서 연봉계약직으로 일하던 한 여성 기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중앙일보가 기록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라는 글을 쓴다. 이 글은 당시 한참 타오르고 있던 촛불집회 참관기였다.


그는 이 글에서 그의 눈으로 직접 본 촛불집회에 대해 "촛불 집회에는 배후 세력은 물론 지도부도, 심지어도 주최측마저 없어 보였다", "관람객인 대중들이 전시회를 이끌어가는 것처럼, 대중들이 철저하게 자율적으로, 촛불 집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었던 것이다", "이 일을 두고 좌파 세력이 배후라거나, 10대와 20대의 철부지 짓이라고 매도한다면 그건 결코 온전한 진실이 아닐 것이다. 그 반대로 촛불 집회야말로 한층 성숙해진 우리 민주주의의 징표가 아닐 수 없었다"며 "내가 몸담고 있는 중앙일보가 최근 기록한 것과 민심은 다시는 맞닿을 일이 없을 것처럼 멀어지고 말았다", "지난 한 달여간 조중동의 보도가 다분히 당파적이고 냉소적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안다"고 썼다.

다음 블로그뉴스에도 중요하게 배치된 이 글에 대해 당시 이 기자의 지적처럼 중앙일보의 보도에 냉소적이었고, 나아가 분노했던 네티즌들은 지지를 보내는 한편, 중앙일보 기자가 자사의 보도에 대해 비판한 것이 자사에 대한 비판여론을 희석시키기 위한 '물타기'가 아니냐고 음모론적으로 바라보며 또 한번 '냉소'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촛불이 사그라듬에 따라 이 글도, 이 기자도 잊혀졌지만, 9월에 이르러 다시 이 글과 이 기자에게 세간의 관심이 쏠리게 된다. 중앙일보와의 계약 만료에 따라 재계약을 해야 했으나, 중앙일보는 재계약을 하지 않고 이 기자를 내쫓았기 때문이다. 연봉계약직임에도 공채 기자들이 시샘을 할 정도로 그 능력을 인정받았던 사람이, 심지어 비슷한 시기 연봉계약을 맺었던 다른 기자들이 재계약을 했음에도 중앙일보는 이 기자를 내쳤다.

당시 이 기자의 소속부서 에디터가 이 기자에게 했던 말.

"이여영씨는 조직 논리에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기여도 많았는데, 안타깝다. 이여영씨가 했던 행동들을 조직에서 받아들이기에는 좀 그렇다. 편집국장이 막아보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도 결과가 이렇게 돼서 유감이다."

이렇게 중앙일보를 강제적으로 그만두게 된 이 기자는 이후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며 여러 매체에 활발한 기고 활동을 펼치는 한편, 문제의 글이 게재됐던 중앙일보 조인스닷컴의 블로그를 떠나 새로운 블로그 둥지를 틀고 여행, 맛집, 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감각적인 글쓰기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새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 기자의 이름은 이여영.
프리랜서 기자 이여영이 얼마 전 '규칙도 두려움도 없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자신의 직장 생활 경험을 반추하며 "20대 여성, 특히 여성 직장인들은 제아무리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정치와 사회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 고유의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강요하는 여러 가지 룰들(rules)에 갇히지 말라. 뭐든 새로 시작해야 하는 시점, 20대에 두려운 것도 당연하다. 일단 두려운 척하지 말라. 규칙도, 두려움도 없는 것, 거기서 시작이다"라고 전하는 이여영의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진 못했기에 책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뭐라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글쓴이의 존재와 목차만으로도 일단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책임은 분명하다. '서울대 출신'에다 심지어 '슈퍼모델' 출신이기까지 한 그의 20대의 경험이 다른 20대 여성들에게 얼마나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도 확인해보고 싶기도 하다.

책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그때 하기로 하자.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여영을 응원하고 싶다.

"중앙일보를 나오고 나서 내 인생이 실패했다는 생각에 몇 날 며칠을 화장실에서 펑펑 울었어요. 혼자 설 수 잇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죠. 하지만 자존심 지키면서 사는 게 옳았다는 확신이 들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중앙일보를 나온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PD저널과의 인터뷰에 등장하는 이여영의 말이다. 솔직하다. 그리고 당차다. 한창 열정적으로 일하던 직장에서 내팽개쳐진 아픔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또 다른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가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여러모로 자극이 된다.

PD저널 기사

중앙일보에서 일하던 당시 그의 윗사람의 말처럼, 그는 '중앙일보'라는 조직이 받아들이기는 힘든 사람임이 분명하다. 아니 중앙일보가 이여영 같은 기자를 포용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편집인의 강연 자리에서 "중앙일보가 삼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영원한 이류 언론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라고 말하는 기자를 중앙일보 따위가 어떻게 안고 갈 수 있을까.

이여영은 중앙일보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뒤 '중앙일보를 떠나며'라는 글에서 "이제 저는 중앙일보에서의 열정과 노력을 기억하며 기자로서 한 단계 더 성장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프리랜서 기자로서의 1년이 지난 3년의 기자생활보다 얻은 게 훨씬 많다"고 말할 정도로 이여영은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자를 내친 중앙일보는 종합편성채널 진출을 공식선언했다. 22일 열린 중앙일보 창간 44돌 기념식에서 홍석현 회장이 "핵심 역량을 하나로 집약하여 종합편성채널을 시작하려 한다"고 선포한 것이다. 홍석현 회장은 종편 진출에 필요한 5000억원 규모의 자본금 가운데 1500억원 정도를 자신의 사재로 출자하겠다고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앙일보의 '핵심 역량'이 어떤 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여영 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기자로서, 언론인으로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회사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일테다.

아직 중앙일보가 종편에 진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확실하게 마련되었다고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중앙일보가 종합편성채널에 진출하기 위한 근거는 지난 7월 국회에서 날치기 처리 시도된 방송법 개정안이다. 하지만 이 법의 유효성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재투표와 대리투표를 통한 방송법 날치기 처리가 무효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중앙일보는 헌재 판결이 있기도 전에 종편 진출을 선언했다. 자만심이 하늘을 찌른다.

설령 중앙일보가 종편에 진출하더라도 나는 그런 중앙일보의 미래에는 별다른 관심도, 신뢰도, 기대도 전혀 없다. 그보다는 중앙일보가 내친 이여영이 앞으로 걸어갈 길이 더 관심이 가고 기대가 간다. 이여영의 말대로 그가 중앙일보를 나온 것은 잘한 일이 분명하다. 아니 그가 앞으로도 계속 그 말을 스스로 증명해주길 기대하며 격려를 보낸다. 지금까지 잘해왔다.

이여영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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